그가 돌아간 날 새겨보는, 괴로운 청년의 초상
사진 = 시인 윤동주
대학 원서접수를 앞둔 어느 날,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앉은 큰아들의 표정이 자못 비장하다. 아들은 일찍이 머리가 비상해 성적은 물론이요 친구들과의 교우관계도 좋고 체육 활동도 우수한 모범생이자 집안의 기대주. 아버지는 의대 진학을 넌지시 권유하는데 아들은 인문대에 가겠다고 선언한다. “거기 가봐야 신문기자밖에 더 되겠냐!” 아버지의 불호령에도 아들은 눈 하나 꿈쩍 않는다. 밥상에서 그릇도 집어 던져봤지만 요지부동이다. 결국, 방에서 이를 듣고 있던 할아버지가 나와 손주의 편을 들어주며 소동은 일단락된다. 어느 평범한 집의 풍경 같은 이 이야기는 사실 시인 윤동주의 일화다. 우리는 이날 의사 한 명을 잃고, 시인 한 명을 지켰다. 1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자식 잘되길 바라는 부모님들의 바람은 같은 모양이다.가방 속의 시집 한 권일본의 압제가 더욱 거세지던 시절, 윤동주가 편입한 평양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순사 멱살 잡기를 숫제 자랑으로 여기는 독립적인 미션스쿨이었다. 그는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로 수업을 듣고, 글을 쓰는 분위기 속에 숭실중학교 YMCA 문예부 잡지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시를 활자로 인쇄하는 경험을 한다. 이때 발표된 시 제목은 ‘공상’인데, 공상가였던 학생 윤동주의 가방에는 정지용의 시집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시집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의 유품 중 하나로, 훗날 그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사각사각 펜 소리가 적산가옥 담벼락을 넘어 어둠 속 골목길에 내려앉는다. 이내 책이 덮이고, 발걸음이 대문을 나선다. 그리곤 표표히 사라진다.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한 이후 윤동주는 거의 매일 산과 들로 산책하러 다녔다. 하숙집에 함께 묵던 옆방 후배를 깨워 집을 나선 뒤 연희의 숲과 서강의 뜰을 꿰뚫는 두어 시간의 코스를 거닐곤 했는데, 이때 그의 손에는 늘 책이 쥐어져 있었다. 함께 걷는 후배에게는 어느 책을 읽고 있는지 묻곤 했다.
사진 = 영화 '동주' 스틸 컷
병든 사회를 치유하는 병원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졸업을 앞두고 자신이 쓴 19편의 작품을 모아 자선시집 출간을 준비했다.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한 다음 표지에 ‘병원’이라고 썼다. 존경하는 교수인 이양하 선생을 찾아 원고를 건네고 출판계획을 말하는데, 원고를 살펴본 선생의 표정이 이내 어두워진다. ‘십자가’, ‘슬픈 족속’과 같은 제목의 작품이 일본 관헌의 검열을 통과할 리 없으며, 오히려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신변에 위험이 될 수 있으니 출간은 미루는 것이 어떻겠냐는 스승의 권유에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때 내놓지 못한 책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다. 당시 윤동주가 제작한 3권의 시고집 중 다른 한 권을 받은 정병욱의 회고에 따르면 원래 제목인 ‘병원’은 일제강점기의 병든 사회를 치유한다는 의미에서 붙인 것으로, 이내 서시를 쓰고 나서 지금의 제목으로 바꾼 것이라고 한다. 그가 이 원고를 잘 보관한 덕에 오늘날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다.죽은 사회의 시인서거 71주년이 지난 윤동주의 시를 아직도 우리가 읽는 까닭은 작품이 갖는 고유한 생명력 때문이다. 회의와 성찰, 자기반성이 담담히 녹아있는 문장을 곱씹고 있노라면 그가 거닐었을 연희의 숲 향기, 서강의 풀 내음이 가까이에 있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윤동주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수한 이과 인재는 앞 다투어 의대로 진학하고, 이에 실패하면 의전원을 통해서라도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중고등학생의 가방에는 문제집과 인강교재가 빼곡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든 대학생에게 산책은 스펙과는 무관한 대단한 사치에 불과하다. 대형 서점의 도서판매현황을 살펴보면 문학 부문에서 시집은 끝줄에 자리하고 있다. 동시대 시인 중 이름을 아는 이가 거의 없다. 졸업 기념으로 77권의 시집을 자비출판 하려 했던 윤동주가 오늘날 출간을 감행했다면 그의 시집은 서점 한구석에서 먼지가 쌓이고 있거나,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이름을 치고 검색해서 찾아내야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는 그래도 책을 냈을 것이고, 시를 썼을 거란 걸. 우리 시대의 윤동주는 어디에 있을까? 자신의 삶을 태우며 치열하게 시를 써내려가고 있을 이름 모를 동주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김희윤 작가 film4h@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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