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사람]데카르트 독살설의 진실
데카르트
철학에 대해 잘 몰라도 많은 이들이 데카르트라는 이름은 들어 알고 있다. 이 이름이 생소하다고 해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은 낯설지 않다. 데카르트의 저서 '방법서설'에 담긴 이 명제는 신 중심의 중세철학에서 인간 중심의 근대철학으로의 변화를 상징했고 합리주의와 이성주의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11일은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가 사망한 지 366년이 되는 날이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렸던 그가 54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죽음을 둘러싼 여러 의문이 제기됐다.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사망한 그의 공식적인 사인은 폐렴이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에서 살던 데카르트가 스톡홀름에 간 것은 스웨덴의 크리스트나 여왕이 교사로 초빙했기 때문이었다. 몸이 약했던 데카르트는 늦게 잠에 들어 정오까지 일어나지 않는 생활에 익숙했다. 하지만 데카르트에게 기하학 등을 배우고 싶었던 여왕은 아침 일찍부터 그와 만나고 싶어 했고 일주일에 세 차례 새벽 5시에 수업을 요청했다고 한다. 데카르트는 유독 추웠던 1650년 겨울 새벽바람을 맞으며 여왕을 만나러 다녔다. 이런 변화가 데카르트의 면역체계를 무너뜨렸고 결국 폐렴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 그의 죽음에 대한 유력한 설이다.하지만 새벽 수업 때문이 아니라 그가 다른 이에게 옮아 폐렴에 걸렸다는 얘기도 있었다. 당시 여왕의 강의를 주선했던 스톡홀름 주재 프랑스 대사가 폐렴에 걸렸었는데 그와 교류하다 데카르트도 감염됐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폐렴을 이기지 못한 것이라면 이는 평소 좋지 않았던 그의 건강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4년 프랑스 베르사유 대학의 필립 샤를리에 교수가 데카르트의 두개골을 X선 단층촬영한 결과에 따르면 그는 코뼈 오른쪽에 비정상적인 크기의 골종이 있었다. 샤를리에 교수는 데카르트의 골종이 너무 비대해 코가 막히거나 콧물이 과도하게 분비되고 안면 고통에 시달렸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데카르트의 죽음에 대해 가장 흥미로운 주장은 바로 독살설이다. 독일 에를랑겐대학의 테오도르 에베르트 교수는 파리와 스톡홀름에 보관된 관련 문서를 검토해 "데카르트가 자크 비오구 신부가 준 비소가 발라진 영성체 빵을 먹고 중독으로 죽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데카르트의 사상이 스웨덴의 여왕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한 가톨릭 신부가 그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에베르트 교수는 데카르트의 주치의가 구토제를 처방했으며 "오줌에서 피가 발견됐는데 이는 비소 같은 중금속에 중독된 증상"이라는 편지를 남겼다고 했다.의문의 죽음 때문일까. 합리적인 이성을 중시했던 그의 머리는 몸과 분리돼 묻혔다. 그의 시신은 스톡홀름의 묘지에 매장됐는데 1666년 프랑스로 옮겨졌다. 그런데 1792년 유해를 파리의 팡테옹으로 이장하기 위해 발굴하니 두개골이 없었다고 한다. 데카르트의 두개골은 시신을 수습한 스웨덴 근위대장이 보관하고 있었으며 1878년 경매에 붙여졌다. 이 두개골은 현재 파리 인류박물관에 전시돼 있는데 '스웨덴 근위대장 한스트림이 따로 보관했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김철현 기자 kch@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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