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범 우석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올해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은 2015년 8월 개봉해 1341만 관객을 동원한 '베테랑'이다. 역대 랭킹으로도 명량, 국제시장, 아바타에 이어 4위에 해당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재벌 그룹 회장의 차남이자 그룹 기획조정실장인 조태오(유아인 분)가 악당으로 나온다. 온갖 패악질을 일삼던 그는 회사 정문에서 일인 시위 중이던 화물차 기사를 보고 부적절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다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된다.11월에 개봉해 이미 500만 관객을 돌파하고 있는 흥행작 '내부자들'에서도 재벌은 악당이다. 신정당 유력 대권 후보인 장필우 의원의 후원자인 미래 자동차 오현수 회장은 은행에서 거액의 불법 대출을 받아 대권 후보에게 300억원의 대선자금을 제공하며, 이를 폭로하려고 하는 주인공에게 고문과 폭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재벌이 모든 악의 원흉으로 나온다.올해 상반기에 방영됐던 SBS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도 제왕적 권력을 누리며 부와 혈통의 세습을 꿈꾸는 대한민국 초일류 상류층의 속물의식에 대한 통렬한 풍자로 인기를 끌었다. 2012년 개봉됐던 '돈의 맛'은 대한민국을 돈으로 지배하는 재벌 백씨 집안을 소재로 돈에 중독된 사람들의 비상식적인 사고와 행동, 그리고 그 세계를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재벌 때리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흥행에 민감한 영화가 재벌 때리기에 나서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을 반영한 걸로 봐야 하는 것 아닐까. 연말 재계엔 3세 경영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대다수의 재벌들이 현재 2세에서 3세로 지분승계가 종료됐거나 진행 중이다. 일부 기업의 경우 4세로의 승계가 이뤄지고 있으며, 3세의 나이가 어린 기업의 경우에도 머지않아 3세들이 경영권과 지분을 넘겨받게 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재벌의 모습은 과장됐다고 치고 3세 경영 시대엔 이 같은 모습이 어떻게 바뀔까. 먼저 3세 경영자들의 일반적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세대 경영자의 경우 창업자인 부친으로부터 기업가 정신을 어느 정도 배웠고, 경우에 따라선 회사를 일으키는 과정에 본인이 일정 부분 참여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3세대들의 경우는 다르다. 이미 재벌의 반열에 접어든 이후 성장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창업자와는 모든 게 다르다. 1세대와는 달리 고등 교육을 받았고 유학경험이 있어서 글로벌한 감각은 있지만 1세대의 기업가 정신과 도전 정신을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다. 최근 들어 기업들의 투자 기피 현상과 경제가 저성장 단계에 접어든 탓도 있지만 1세 경영과 3세 경영의 차이 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1세대들의 상당수가 어린 시절 배고픔을 경험했던 것과는 달리 3세대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재벌이었다. 재벌가 자녀로서 풍족함을 자연스럽게 경험했으며 먹고 마시는 생활환경도 차원이 다르다. 이들은 경영 일선에 나서면서 먹고 마시고 꾸미는 사업에 관심을 갖는 경향이 뚜렷하다. 애당초 제조업엔 관심이 별로 없었다. 혁신적 체질을 갖기엔 가진 게 너무 많았다. 게다가 직원들과 피땀을 함께 흘렸던 1세대들과는 달리 3세대들은 밑바닥을 경험하지 못한 탓에 종업원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합리적이긴 해도 일반인과의 교감은 별로 없다. 오늘날 한국 경제의 어려움도 알고 보면 3세 경영자들이 선대의 사업을 수성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 새로운 먹거리나 일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세대들이 경영권을 승계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엔 재벌들이 기여하는 바도 컸으므로 용서가 됐지만 이젠 누리는 것에 비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으니 국민들의 시선이 차가워진 게 아닐까. 따라서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라고 치부해서만 될 일이 아니다. 한국 경제로선 성장동력이 될 새로운 기업세대들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결과 이미 오래된 기업의 3세들만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천수답이 돼 버린 게 안타깝다. 한국의 100대 부자 중 84명이 상속 부자이고 미국은 78명이 자수성가형 부자라고 한다. 이른바 금수저, 흙수저론이 막연한 농담만은 아니다. 민심 흐름의 무서운 변화가 한국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이다. 최성범 우석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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