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의 역설 '젠트리피케이션'…원주민이 사라진다

풍선효과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 확대…대책필요

[아시아경제 유제훈, 원다라 기자] #고서적 수집이 취미인 박모(61)씨는 10여년 전부터 낯설어진 서울 인사동을 잘 찾지 않는다. 관광객과 상점이 집중된 대표적 상업지로 발돋움하면서다. 젊은 시절 자주찾던 서점이나 표구화랑은 어느새 관광상품 판매점이나 찻집으로 바뀌어 있다. 박씨는 "어느새 인사동에서만 느끼던 옛 맛이 사라졌다"며 "흔히 보는 그저 그런 관광지의 번잡함이 싫어서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인사동 거리의 이같은 변화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의 한 단면이다. 독특한 멋과 맛을 내던 특색이 사라진 거리에 대형 프랜차이즈나 천편일률적인 상점 등만 즐비해지고 있는 것. 젠트리피케이션은 비단 인사동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대학로, 인사동, 신촌ㆍ홍대ㆍ합정, 북촌, 서촌, 성미산 마을, 해방촌, 세운상가, 성수동 등 서울시내 곳곳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나타나는 원인은 간단하다. 관광객이 몰리며 땅값이 오르게 되고 임대료 상승 부담을 견디지 못한 기존 상권이 밀려나면서 새로운 형태의 상권이 형성되는 것이다. 임대료 상승은 통계를 보면 쉽게 드러난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최근 청년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성수동 1가의 임대료가 최근 1년새 35.3%나 상승했다. 홍대 역시 1년간 임대료가 20~40%나 올랐다. 젊은이들이 몰리는 이태원 골목상권은 지난 2011년부터 올해 6월까지 68.6%나 올랐다. 이러다보니 저렴한 임대료 탓에 옛 도심에 터를 잡은 독특한 가게나 화랑 등은 설 곳을 잃어가는 셈이다.25일 오후 찾은 서촌에서는 이같은 현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서촌은 서울의 대표적 한옥촌(村)으로, 수십년 터줏대감인 주민들이 살아가며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이었다. 2008년 전후로는 정부 정책에 힘입어 한옥 건축이 활성화되고 개량사업이 활발해졌다. 자연스레 한옥과 골목길의 낭만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내 서촌의 풍경은 달라져갔다. 이제 서촌 골목은 번화가라면 마주칠 수 있는 비슷한 종류의 카페나 옷가게들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관광객을 위한 상점이 늘어나면서 남아있던 원주민들이 하나둘씩 떠나며 옛 한옥촌 골목은 상당부분 변화됐다. 땅값이 오르며 원주민들은 이미 이사했고 남아있는 임차인들은 치솟은 월세를 걱정하고 있다. 옛 골목의 정취를 느끼려던 이들도 줄어들었다.서촌에서 30년째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상인 이모(52)씨는 이런 변화 속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 2007년만 하더라도 15㎡ 가량 되는 점포의 월세는 50만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몰리고, 땅값이 오른 후 건물주가 바뀌면서 월세는 천정부지로 올랐다. 올해 9월 새 건물주가 요구한 월세는 250만원이다. 8년만에 5배가 올랐다. 이씨는 "30년 동안 이 고즈넉한 동네에서 살면서 아이들을 다 키웠다"며 "하지만 어느새 카페, 옷가게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동네가 삭막해졌고 자리를 지키던 주민들도 하나둘씩 마을을 떠났다"고 씁쓸해 했다. 그는 또 "사실 새로 들어오는 가게들도 워낙 임대료가 높고 경쟁이 심하니 몇 번씩 바뀌는 점포도 있다"고 덧붙였다.청춘의 메카라 불리는 홍대역시 그 모습이 크게 변했다. 예술가, 청년자영업자가 만들었던 독특한 공연장과 가게들은 대형 프랜차이즈나 평범한 주점 등으로 바뀌어버린 상태다. 상인 신가람(35)씨는 이곳을 떠났다. 이씨는 지난 2012년 홍대의 한 주택가 빈집 지하1층에 주점 '뿅뿅뿅'을 열었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이색적인 분위기에 반한 젊은이들이 몰려들면서 장사도 번창했다. 하지만 7개월만에 건물주가 바뀌고 상황은 달라졌다. 새 건물주는 임대료를 90만원에서 160만원(관리비 포함)으로 올렸다. 여기에 권리금 소송까지 2년간 이어지자 신씨는 버티다 못해 지난 9월 가게의 문을 닫았다. 신씨가 떠난 가게 자리에는 프랜차이즈 치킨점이 들어섰다. 신씨는 "요즘 청년들이 직접 창업에 나서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상황을 겪고보니 주변에 창업을 권유하기도 꺼려진다"고 말했다.도심 곳곳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면서 문화예술인, 상인들은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 이른바 '풍선효과'다. 그런데 이들이 옮겨간 지역에서도 다시한번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할 조짐이 보이는 등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서울시 관계자는 "홍대, 북촌, 이태원 등에서 발생한 젠트리피케이션이 각각 경리단길, 연남동, 서촌 등으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라며 "도시의 특성을 잘 유지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한 관광수요 창출을 하기 위해서라도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을 대안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사회부 유제훈 기자 kalamal@asiae.co.kr사회부 원다라 기자 supermoo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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