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서 배역 몰입 위해 48시간 無수면 연기
극중 '염석진' 감정 이해하려 일제 관련 다큐·기사 찾아보며 캐릭터 잡아
이정재[사진=백소아 기자]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경험과 실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많은 작품에 출연해도 약점을 고치지 못하는 배우가 부지기수다. 대중의 기대를 저버려 도태되는 경우도 흔하다. 이정재(42)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스물한 살 때 출연한 '젊은 남자(1994)'로 각종 영화제의 신인상을 쓸어 담았지만 그 뒤 다양한 장르의 열여섯 작품에서 이렇다 할 흥행을 이끌지 못했다. 깔끔하고 차가운 이미지를 바꾸는데도 실패했다. 긴 대사를 전달하는데 한계가 있고, 캐릭터의 복잡한 내면을 표현할 만큼 연기가 성숙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도 충무로의 감독들이 그를 끊임없이 찾은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정재는 시청률 64.5%의 드라마 '모래시계(1995)'를 통해 청춘의 아이콘이자 '터프가이'의 대명사로 자리를 잡았다. 또 다른 요인은 얼굴. 눈이 크고 눈꼬리가 길어 전체적으로 인자한 인상인데 콧날과 턱선이 날카로워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기에 제격이다. 연기인생의 전환점이 된 '태양은 없다(1998)'에서 친근하면서도 영악한 홍기를 무난하게 그려낸 비결이다.
이정재[사진=백소아 기자]
그는 2005년 '태풍' 뒤 5년여 간 정체기를 겪었다. 연기는 조금씩 발전했지만 소모된 청춘의 이미지를 대체하기에는 부족했다. 이정재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했다. "시나리오를 너무 고르다가 작품을 할 타이밍을 놓쳤다. 대중과 멀어졌고 자연스럽게 인지도도 떨어졌다. 슬럼프였다. 좋은 시나리오가 소위 잘 나가는 배우들에게로만 갔다." 그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동문들이 마련한 연극 '햄릿(2008)'에서 '햄릿'을 연기했고 책, 그림, 영화 등을 통해 영감을 얻으려 애썼다. 이정재는 "일상에서 감각을 곧추세우려고 노력한다. 과거에는 경험, 정보, 지식 등이 일천했는데 점점 확대되면서 표현력이 짙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하녀(2010)'로 재기했다. '도둑들(2012)', '신세계(2012)', '관상(2013)' 등의 흥행으로 제2의 전성기까지 열었다. 이정재는 "연기가 갑자기 바뀌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했다. "꾸준한 노력이 작은 결실로 이어졌다고 본다. 40대가 되면서 배우로서 보여줄 여지가 많아지기도 했고. 긴장감을 유도하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20대나 30대 초반의 캐릭터는 드물다." 연기에 접근하는 자세도 달라졌다. 모델 출신 배우의 원조 격인 그는 '태양은 없다'를 찍기 전까지 배우를 천직으로 여기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앞에 놓인 길을 걷다가 뒤늦게 깨달은 경우다. 이정재는 "알면 알수록 어려운 연기지만 이제야 조금 편해진 느낌이 있다. 재미있는 환경에서 일하면 어려운 주문도 비교적 수월하게 해내는 것 같다"고 했다.
이정재[사진=백소아 기자]
오는 22일 개봉하는 '암살'이 그랬다. '도둑들'의 최동훈(44) 감독과 다시 손을 잡았다.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1년 후배인 전지현(34)과는 '시월애', '도둑들'에 이은 세 번째 호흡이다. 그가 맡은 염석진은 복잡한 내면의 소유자다. 냉철한 판단력과 치밀한 전략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절대적 신임을 받지만 친일로 돌아선다. 이정재는 "배역을 제의받았을 때만 해도 변절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와 관련한 다큐멘터리, 기사 등을 살펴보고 나서야 염석진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캐릭터였다. 실존 인물이라 생각하고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했다. 이런 노력은 아편굴을 찾아 친일로 돌아서는 신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48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촬영한 이정재의 얼굴에서 염석진의 고뇌와 슬픔, 분노 등이 절묘하게 뒤섞여 나타난다. 그는 "변화를 합리화하는 장면이기에 힘을 줘야 했다. 내면을 섬세하게 보여줘야 중반부 전개가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실제 있었던 것처럼 연기하는 능력이 이제 조금 생긴 것 같다"고 했다. 배우가 느끼는 변화는 대중에게 '별 것 아닌 것'처럼 비치기 쉽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예외가 될 수 있다. 이정재가 숱한 지적을 받으며 갈고닦은 노력의 집약체에 가깝다. 그를 두 번이나 기용한 최 감독이 다시 한 번 욕심이 난다고 말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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