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박신자컵 서머리그'

허진석 문화스포츠레저부장

유니버시아드(Universiade)는 대학(University)과 올림피아드(Olympiad)의 합성어다. 국제대학스포츠연맹(FISU)이 주관하는 대학생 종합경기대회다. 우리나라는 제1회 대회(1959년 이탈리아 토리노)부터 참가했다.  주요 외신은 유니버시아드를 흔히 학생경기대회(Student Game)로 표기하며 크게 보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중요한 국제종합경기대회다. 대한체육회의 기준에 따르면 유니버시아드에서 따낸 금메달에는 연금점수 10점, 은메달엔 2점, 동메달엔 1점을 부여한다. 아시안게임과 똑같다. 올림픽은 금ㆍ은ㆍ동 각각 90, 30, 20점이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은 4년마다 열리지만 유니버시아드는 2년에 한 번씩 열려 메달을 딸 기회가 많다. 유니버시아드에 참가하는 외국 선수 가운데 상당수가 아마추어들이다. 그래서 한국 선수들은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 비해 좋은 성적을 내는 편이다. 1967년 일본 도쿄유니버시아드에 참가한 한국 남녀농구가 좋은 예다. 남자는 미국에 이어 준우승, 여자는 일본을 누르고 우승했다. 사실 여자 농구 우승은 식은 죽 먹기였다. 한국은 같은 해 4월에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체코) 준우승팀이었다. 세계선수권 최우수선수인 박신자 선생을 비롯, 김추자ㆍ주희봉 등 주축 선수가 모두 도쿄에 갔다. 박 선생은 네 경기에서 111점을 넣어 득점왕을 했다.  나는 박신자 선생의 전성기를 보지 못했다. 그가 세계를 누빌 때는 콧물을 핥고 있었다. 1991년 겨울, 아마추어대회인 '농구대잔치' 시절에 박 선생을 자주 만났다. 그에게 농구 관전평을 부탁했다.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관전평을 쓴 한 시즌 동안 그는 매 순간을 즐겼다. 주요 경기는 오후 두 시 전후에 열렸다. 박 선생은 일찍 잠실학생체육관에 나가 일정을 확인한 다음 천천히 걸어 아시아선수촌아파트 근처 골목 안에 있는 설렁탕집에 가서 혼자 점심을 들었다. 그의 글은 남달랐다. 경험을 녹여 쉽게 썼는데 후배 선수들에 대한 애정이 넘쳐흘렀다.  그를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다. 1992년 6월 스페인의 비고에서 프레올림픽이 열렸을 때다. 바르셀로나올림픽 예선이었다. 박신자 선생은 그곳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 대표선수들을 뒷바라지했다. 통역과 응원단장을 자처했다. 대표팀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식탁은 늘 고요했다. 박 선생은 손으로 김치를 찢어 선수들의 수저에 얹어 주었다. "많이 먹어. 힘을 내야 끝까지 싸울 수 있어."  오랫동안 박신자 선생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 3일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의 새 총재인 신선우씨가 취임식을 하는 자리에서 박 선생을 만났다. 내가 인사를 하자 박 선생은 허리를 굽히며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지금 강원도 속초에 있다. 거기서 '박신자컵 서머리그'가 열린다. 박 선생은 주인공으로서 시구(始球)를 할 것이다. 그의 이름을 담은 대회가 왜 이제야 열리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오래 유지될지도 의문이다. 차라리 여자프로농구 우승컵을 '박신자컵'이라고 하면 어떨까. 우리 스포츠는 역사를 거듭하면서 수많은 전설을 낳고 있다. 축구의 차범근, 야구의 박찬호, 골프의 박세리, 권투의 홍수환…. '살아있는 전설'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기 어려운 시기에 박신자 선생을 기리는 대회는 위안을 준다.  박 선생이 행복하게 이 시간을 즐기기를 바란다. 그리고 부디 광주에서 열리는 유니버시아드도 관전하시길. 그가 이룩한 유니버시아드대회 우승의 신화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가운데 지워져 간다. 허진석 문화스포츠레저부장 huhball@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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