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발견]여자도 사람이다, 나혜석의 자화상

나는 어린 시절 제대로 된 이름이 없었다. 그냥 '아기'로 불렸다. 열다섯 살 때 서울의 진명여학교에 편입학하면서 집안의 돌림자인 '석(錫)'을 넣어, 혜석이란 이름을 얻었다.  1913년 열여덟 살 때 도쿄여자미술대학으로 유학을 갔고 서양화를 배웠다. 이 무렵 내게 사랑을 눈뜨게 해준 한 남자를 만났다. 시인이었던 최승구. 그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 1916년 2월에 폐결핵으로 최승구를 잃었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신경쇠약에 걸린 나를 붙잡아준 이는 교토제국대학 법학과 김우영이었다. 1920년 4월에 정동교회 예식장에서 우린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내가 남편에게 요구한 조건 중의 하나는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달라는 것'이었다. 김우영은 내 말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나혜석 자화상 1929년

 자화상을 나는 여러 번 그렸지만 1929년과 1933년의 것을 특히 잊지 못한다. 나로서는 몹시 의미 있는 때였기 때문이다. 1929년 서른넷이었던 나는 프랑스를 거쳐 미국에 가 있었다. 일본 외무성이 외교관 신분이던 남편에게 여비와 함께 포상휴가를 주었다. 1927년 여름 이후 파리에서 8개월을 머물렀다. 남편은 법률공부를 위해 독일 베를린으로 떠났는데, 이때 3ㆍ1 운동 때 독립선언서 작성을 주도한 최린을 만났다. 오페라를 보고 온 그 밤, 최린은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혜석 자화상 1933년

우리의 연애사건은 파리를 떠들썩하게 했고, 독일에서 돌아온 남편이 이 상황을 목격했지만 덮어주었다. 귀국 후 최린을 다시 만나자 김우영은 이혼을 요구했고 1930년 우린 헤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1929년의 자화상은 파리의 야수파에 눈을 뜬 시절의 분방한 색채와 필치가 선연하다. 사실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대상을 단순화한 이런 그림은 당시 조선이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1933년 내 얼굴과 내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남자들의 세상에 대해 환멸하고 있었다. 가난과 고립과 절망이 엄습했다. 나는 외쳤다. "여자도 사람이다. 외도는 진보된 여성의 마땅한 감정일 뿐이다." 고통으로 가득찬 이 그림의 나혜석을 나는 사랑한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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