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재 논설위원
칸트는 여든 해 생의 마지막 날 물에 적신 포도주를 입술에 대고 "아, 좋다" 하고는 눈을 감았다. 소크라테스는 탈옥하라는 친구의 애원을 뿌리치고 의연히 독배를 마셨다. 도연명은 "나를 위해 봉분도 나무도 세우지 말라" 하고는 저 본택(本宅)으로 돌아갔다. 지상에서의 충만했던 삶만큼 그 끝도 아름다웠던 죽음, 한 번 죽어 영원히 살게 된 죽음, 자연이 정해놓은 한계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초연한 죽음, 그런 죽음은 삶 이상의 죽음, 불사의 삶을 완성해주는 죽음이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죽음이 있다. 결코 허용할 수 없는 죽음이 있다. 그 죽음은 곧 그 사회의 소멸이어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죽음이 있다. 그것은 아이들의 죽음이다. 아이들의 죽음은 곧 세상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죽음은 어떤 죽음이라도, 설령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죽음이라도 실은 죽임을 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작년 그날 아이들이 죽었을 때 우리는 함께 죽었어야 했다. 아이들이 차가운 물속에서 죽어갔을 때 우리는 모두 함께 죽었어야 했다. 그래야 우리는 죽었다가 간신히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죽지 않고서, 그냥 살아서 끼니때면 식탁에 앉아 밥을 넘기며 살고 있으니, 그때마다, 매일 매 순간, 우리는 너희들을 또 죽이고 있구나. 열여섯 살 예슬이가 물이 차오는 배 안에서 창밖 푸른 하늘을 보며, 엄마, 나 엄마한테 짜증낸 것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예쁜 내 동생 예진이가 이번 일요일에 놀이공원 가기로 해서 나 기다리고 있는데, 엄마 그래서 나 살고 싶어요, 너무 너무 살고 싶어요, 그렇게 죽어간 너를 우리는 또 죽이고 있구나. 아아, 게다가 어떤 이들은 예슬이 너의 그 순결한 머리칼 마지막 한 올까지도, 미처 내뱉지 못한 그 마지막 가냘픈 숨까지도 기어이 끊어놓겠다는 듯, 죽음의 끝까지 죽이려 하고 있구나. 아이들아, 우리의 아이들아, 우리의 아들들아, 우리의 딸들아, 우리의 누이들아, 우리를 살려주렴. 아기보다 더 아기 같고, 어른보다 더 어른 같은 아이들아, 돌아와 우리를 벌해서 우리를 살려주렴. 단 하루만이라도, 단 한 시간만이라도, 아니 단 한 순간만이라도 너의 고운 볼, 어여쁜 손을 만져볼 수 있게, 그래서 단 한 마디, 미안하구나, 미안하구나 단 한마디만 할 수 있게, 그러고 너를 보내야 우리가 살 수 있으니, 제발 돌아오렴. 돌아오렴, 돌아오렴, 돌아오렴. 이명재 논설위원 prome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논설실 이명재 기자 promes@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