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가끔 꿈을 꾸면 총천연색 액션 어드벤처 스펙터클 로맨스에 취하곤 한다. 건조한 삶에 대한 무의식의 작은 보상이랄까. 안타깝게도 이런 기질은 악몽에도 적용된다. 현실보다 더한 공포에 허우적대다 불현듯 깨어나면 한동안 맥이 풀린다. 어제도 그랬다. 그것도 두 편을 시리즈로. 악몽 1탄. 말년 휴가를 다녀왔는데 제대 날짜가 무려 6개월이나 남았다. 세상에 180일(6개월 곱하기 30일)이나 짬밥을 더 먹어야 하고 4320시간(180일 곱하기 24시간)이나 등짝을 내무반에 내줘야 하다니. 너덜너덜한 군화가 펄쩍 뛰고 배식판의 시뻘건 깍두기가 통곡할 일이다. 이건 행정상의 오류가 분명하다며 선임하사를 찾아가 닭똥같은 눈물을 떨궈보지만 소용이 없다. 그 순간 국방부 시계는 또~오딱 또~오딱 슬로모션으로 공포스럽게 흘러가는 거다. 악몽 2탄. 저 6개월을 어찌어찌 버텨 마침내 제대하는 날. 친구 A가 전화를 걸어 제대 파티를 해주겠다니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출 것 같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예비역의 기상과 호기를 보여주리라 다짐하며 약속 장소로 갔는데 분위기가 영 수상하다. 젊은 사람들이 양복을 빼입고 줄지어 앉아 구호를 외치는 게 말로만 듣던 '불법 다단계'가 틀림없다. 제대의 기쁨에 취해 사리분별이 흐려진 나머지 A의 낚시 바늘을 덥석 물다니. 과연 저들이 요구하는 대로 전기매트를 사지 않으면 포로 신분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냐며 꿈속에서도 구슬피 우는 거다. 그래도 악몽은 깨어나면 그만이다.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악몽이다. 악몽보다 더한 현실이다. 직장을 구하지 못한 놀청(15~29세 놀고 있는 청년)이 10명 중 1명(11.1%ㆍ2월 기준)에 달한다. 활기를 잃은 일본(6.6%)보다도 높은 수치다.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장미족(장기간 취업을 하지 못한 사람), 청년실신(학자금 대출을 갚지 못한 신용불량자)은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다. 취업난을 견디지 못해 누구는 졸업을 미루고 누구는 군대를 간다. 청춘들에게는 차라리 군대가 안식처다. 가뜩이나 우울한데 실업에 짓눌린 이들을 노리는 불법 다단계가 횡행한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취업은 어렵고 돈은 벌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을 강탈하는 인면수심의 폭력이다. 그 바람에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결별한 청춘들은 사회의 사각지대로 내몰린다. 청춘들이 희망을 빼앗기면 우리는 미래를 상실한다. 대한민국은 활기를 잃어간다. 그러니 어서 빨리 이 악몽에서 깨어나길 바랄 뿐. 이정일 금융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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