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섭 전 서울고법원장
[아시아경제 김재연 기자]"결과된 재판이 60점짜리였는지 50점 미만의 것이었는지는, 자신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임상의 경험이 깊어져 가는 의사는 차츰 진단과 투약에 겁을 먹게 된다 하거니와, 이것은 聽訟 斷罪(청송 단죄 : 송사를 듣고 판결함)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수필집 무상을 넘어서 中>'막말' '사채왕' 판사 앞에 민망한 수식어가 붙는 시대에 '사도법관'이라 불리는 고(故) 김홍섭 판사 50주기 추념식이 오는 16일 열린다. 예수의 12제자, '사도(使徒)'라는 이름의 무게마냥 고인은 판결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청렴한 삶·온정의 끈을 놓지 않았던 법관이자 구도자였다. 1년 여간 추모행사를 준비하며 김홍섭의 삶을 간접적으로 들여다 본 노태악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내가 과연 판단자 입장에 위치할 만한 자격이 되는지 스스로 물으며 사람에 대한 본성과 법률을 끊임없이 연구하신 분"이라고 말했다.김 판사는 지역에 따라 같은 죄라도 형량이 다르게 나오는 문제를 제기하는 등 불편부당한 재판을 위해 노력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중형을 받은 죄수가 판결을 듣고 '감동했다'고 할 만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이해 속에서 판결을 내렸다고 전해진다.'재판에 임할 때 죄인들의 생명과 법관 자신의 생명을 비교해 보라'. 고인이 후배법관들에게 종종 한 말이자 자기 자신이 평생 새겼던 말이기도 했다.지금보다 판사의 사회적 위치가 높은 때였지만 그는 어느 판사보다도 청빈하게 살았다. 법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양복하나가 없어 지인이 외투를 덮어 주는 가 하면 수도생활에 지장이 된다며 처가에서 보내준 쌀가마니마저 되돌려 보내기도 했다. 검사 생활에 회의를 느껴 뚝섬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돼지를 키우기도 했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은 평생 고인이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봉급을 털어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형수들을 돕기도 했으며 소년범을 대할 때도 벌을 주기 보단 교화를 하기 위해 애썼다. '절망의 생명을 어루만지던 대부(한승헌 전 감사원장)' 수인(囚人)들의 아버지' 등의 별칭은 법관 이전에 휴머니스트였던 고인의 삶을 보여준다.후배판사들은 돌아가신 지 50년이 지났지만 지금이야말로 고인의 삶과 자세를 주목해야할 때라고 말한다. "'막말 판사'로 인해 판사의 형식적인 언행이 문제가 되고 김영란법으로 공직자의 청렴문제가 부각되는 지금, 판사로서의 기본자세를 전형적으로 보여준 고인을 주목해야 합니다" 1년 여간 추모집과 추모행사를 준비한 오경미 판사의 말이다. 서울법원종합청사 1층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추념식은 사법연수원 41기 출신으로 이뤄진 법조 관현악단 'ma non troppo'의 식전공연으로 시작해 유족대표 인사와 다큐멘터리 상영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서울법원종합청사 1층 대회의실 앞에서는 오는 18일까지 사도법관 김홍섭 회고전이 열린다.김재연 기자 ukebida@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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