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서울 삼성역에서 현대백화점으로 들어가는 지하 통로에 특별한 인테리어가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는 해 묵은 재봉틀이 160대나 진열되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지난 10월 문을 연 영국 브랜드의 한 옷가게 실내장식이다. 옷을 만드는 기계가 본래 기능을 잃은채 장식품이 되어 시선을 빼앗고 있는 중이다.재봉틀은 1790년 영국의 Thomas Saint가 처음 기계화했고 1830년 프랑스의 Barthelemy Thimonnier이 특허를 얻기도 했으나, 1846년 미국에서 Elias Howe가 비로서 기능적인 '바느질 기계'를 발명해낸다. 그 재봉틀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6년 뒤였다. 미국인 Isaac Merritt Singer가 40세의 나이에 40달러를 빌려 뉴욕에 '싱거' 회사를 차리고, 개량된 가정용 재봉틀을 본격생산하기 시작했다. 전 세계 아낙네들의 선풍적인 인기를 끈 '싱거 재봉틀 시대'는 그렇게 열렸다. 싱거의 판매량은 매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1867년 스코틀랜드에 공장을 차려 세계최초로 다국적 생산회사가 됐고, 최초로 할부 판매방식을 도입하면서 사업은 불꽃처럼 확장 바람을 탔다. 마침내 1908년 뉴욕 브로드웨이에 47층짜리 본사사옥이 들어섰다. 당시로는 최고층 빌딩으로 최초의 현대식 마천루였다. 그러나 1999년 9월 어느 날 싱거는 그동안의 영화를 뒤로하고 파산신청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기성복 시대가 열리고, 집에서 바느질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재봉틀이 서서히 여인들의 손끝에서 사라져 가는 '바느질 문화'의 혁명적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에 재봉틀이 들어온 시기는 1877년으로, 강원도 금화(金化)에 사는 김용원(金鏞元: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부친)이 일본에 갔다가 서양 사람에게서 이 신기한 기계를 사가지고 왔다고 한다. 아마도 '싱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것을 본 당시 사람들은 마치 요술쟁이인양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전해진다. 뒤이어 1896년 이화학당의 교과목 가운데에 재봉과 자수가 등장하고, 1904년 3학년 교과목에는 '재봉기 사용법'이 들어있다. 뿐만 아니라 1905년 12월 20일자 제국신문에 '싱거 재봉기계회사의 대한나라 지점 설시와 방매'라는 광고 등으로 미루어 재봉틀의 대중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1960년대 초에는 국산제품이 생산되었다. 그렇게 재봉틀은 60년대, 70년대에는 혼수 1호가 되어 각 가정마다 안방을 차지 할 만큼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어렵던 그 시절 재봉틀 하나로 가정을 꾸리고 자식들을 교육 시키는, 이른바 '삯바느질'이란 경제 행위가 여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오늘날 과학과 산업의 발달은 흔히 우리들의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놓곤 한다. 바느질 역시 그랬다. 바느질해야 할 물량은 재봉틀이 처음 등장했을 때에 비해 엄청나게 늘었음에도 '바느질 장소'는 가정에서 공장으로 도도한 물결을 이루며 바뀌어 갔다. 재봉틀 수요가 급격히 줄어드는 새로운 시장패턴이 등장한 것이다. 전 세계 안방에서 사랑 받던 싱거는 그 같은 거대한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산의 길을 걸어갔다. 안방 재봉틀의 성공과 좌절에서 우리는 그 점을 배워야 한다. 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산업부 임혜선 기자 lhsro@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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