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철의 인사이드스포츠]한국에 '클레멘테 상'이 있다면

최동원[사진=롯데 자이언츠 제공]

1994년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올스타전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홈 스리리버 스타디움에서 열렸다. 2000년까지 파이어리츠와 프로미식축구리그(NFL) 피츠버그 스틸러스가 함께 홈구장으로 사용한 이 곳에 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불세출의 스타플레어이자 기부 천사였던 로베트토 클레멘테의 동상이었다. 파이어리츠가 2001년 개장한 PNC 파크로 둥지를 옮길 때 클레멘테의 동상도 당연히 함께 옮겨져 오늘도 파이어리츠 팬들과 함께하고 있다. 클레멘테는 1972년, 서른여덟 살의 이른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오로지 파이어리츠(1955년~1972년)에서만 뛰었다. 남미 출신 선수로는 처음으로 선발 멤버(우익수)로 나서 월드시리즈(1960년) 우승을 이뤘고 1966년에는 역시 남미 출신 선수로는 처음으로 내셔널리그 최우수선수(MVP)로 뽑혔다. 남미 출신 선수가 월드시리즈 MVP(1971년)에 오른 것도 클레멘테가 최초다. 생애 통산 3000안타와 240홈런 1305타점 그리고 타율 0.317에 빛나는 클레멘테에게 열다섯 차례 올스타 멤버와 열두 차례 골든글러브, 네 차례 내셔널리그 타격왕은 또 다른 훈장이다. 그의 등번호 21번은 파이어리츠 구단의 영구 결번이다. 타계 이듬해인 1973년 92.7%의 높은 지지를 받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니 야구 선수로서 클레멘테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클레멘테가 운동만 잘해서 이런 영예를 누릴 수 있었을까. 꽤 많은 야구팬들이 알고 있듯이 클레멘테는 비시즌만 되면 조국인 푸에르토리코는 물론이고 남미 여러 나라에서 기부 활동을 했다. 1972년 10월 23일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에는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이 일어나기 3주 전에 마나과를 다녀왔던 클레멘테는 곧바로 구호 물품을 실을 비행 편을 확보했다. 그런데 클레멘테는 세 차례 피해 지역을 다녀온 비행기에 실린 구호 물품을 악명 높았던 소모사 정권의 부패한 관리들이 빼돌려 피해 지역 주민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클레멘테는 네 번째 비행편에 동승했다. 자신이 가면 구호 물품이 피해 주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2년 12월 31일 클레멘테가 탄 비행기는 이륙 직후 푸에르토리코 앞 바다에 추락했다.

민병헌[사진=아시아경제 DB]

메이저리그는 그의 생전 활동을 기려 해마다 ‘로베트로 클레멘테 상’을 시상하고 있다. 원래 이 상은 커미셔너 상으로 1971년 시작됐는데 1973년에 이름을 바꿨다. 올해는 폴 코너코(시카고 화이트삭스)와 지미 롤린스(필라델피아 필리스)가 공동으로 받았다. 역대 수상자 가운데에는 루 브록(1975년), 로드 커루(1977년), 스티브 가비(1981년), 세실 쿠퍼(1983년), 개리 카터(1989년), 칼 립켄 주니어(1992년), 데이브 윈필드(1994년), 커트 실링(2001년), 존 스몰츠(2005년), 앨버트 푸홀스(2008년), 데릭 지터(2009년), 클레이튼 커쇼(2012년) 그리고 지난해 카를로스 벨트란까지 중·장년 팬들은 물론 신세대 팬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많다. 글쓴이는 최근 서울 잠신중학교 야구부 조연제 감독을 만나 감동적인 얘기를 들었다. 지난해 KIA에서 한화로 이적하면서 이른바 ‘FA 대박’을 터뜨린 이 학교 졸업생 이용규가 계약금 가운데 3천만 원을 기부했다는 것이다. 실내 연습장에 깔린 인조 잔디와 조명 시설을 이용규의 기부금으로 마련했다고 한다. 또 다른 졸업생인 민병헌(두산)은 비시즌에 모교를 찾아 후배들에게 레슨도 하고 글러브 등 야구 용품도 선물한다고 한다. 유신고 출신의 최정도 매달 모교에 1천만원씩을 기부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매스컴을 통해 알려지지 않는 선행이다. 글쓴이는 이번 비시즌에 고 최동원 선수의 모친 김정자 여사의 봉사 활동 이야기를 듣고 또 한 번 감동했다. 글쓴이는 김 여사와 오랜 기간 전화로 인연(?)을 맺어 왔다. 1980년대 최동원 선수를 취재하기 위해 그의 부친인 고 최윤식 씨에게 전화를 하면 늘 김 여사가 먼저 받고 전화를 바꿔 줬다. 사직 구장에서 두 차례 뵌 적도 있다. 부산의 한 사회복지시설에 따르면 김 여사는 2003년부터 매주 월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이 시설에서 장애인들의 식사를 돕고 한글과 숫자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또 매주 화요일부터 금요일에는 오전 9시 30분부터 오전 11시까지 또 다른 사회복지시설에서 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김 여사는 평생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재능 기부 선행인 셈이다.

최정[사진=아시아경제 DB]

3년 전 최동원 선수의 장례식장에서 뵌 김 여사는 예전 그대로 인자한 인상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2003년 남편을 먼저 보낸 뒤 시작했다는 봉사 활동이 아들마저 떠나보낸 그때에도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 그랬다. 봉사 활동을 하고 선행을 하면, 자기 스스로 행복하다고.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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