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다'의 포스터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살다’를 본다. 1952년작인데 놀랍게도 별로 낡은 게 없다. 1952년이면 일본이 패전 이후의 폐허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던 때였다. 이웃 한국에선 남북전쟁이 진행 중이었던 때이니 심란한 시절이었으리라.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않은 삶. 습관과 무기력, 무책임과 면피로 하루하루 때우기에 급급한 삶. 뭐든지 제대로 되어가는 것 하나 없는 일본을 들여다보며 구로자와 감독은 정색을 하고 묻는다. ‘당신은 살아있는가?’ 꽤 오래된 친구 중에 ‘살다’라는 아이디를 쓰는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많지도 않은데 ‘살다’라니...나는 웃었다. 그러나 그는 웃지 않았다. 영화광이었던 그는 구로자와 아키라를 얘기하지도 않았고 영화 ‘살다’가 던졌던 당혹스런 질문에 대해서도 힌트를 주지 않았다. ‘살다’는 산다, 살았다, 살겠다 따위 동사의 기본형이다. ‘산다’와 ‘살다’는 어감이 그래서 달라진다. ‘살다’에는 삶을 기술하려는 바깥의 시선이 숨어있다. 생물적인 의미, 혹은 주체적인 의미의 ‘산다’에는 욕망과 생기가 있다. 그러나 ‘살다’는 반성적이고 회고적이며 사변적이다. 그런 다른 뉘앙스가 생겨난 건, 삶의 내부와 외부의 온도 차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영화 '살다'의 한장면
구로자와는 계몽적이다. 그러나 시니컬하고 냉혹한 시선을 놓지 않았다. 그 덕분에 영화가 참신해졌다. 이 감독은 ‘살아있으면서도 살아있지 않는 인생’의 대표로 ‘공무원’을 꼽았다. 2008년 지금의 공무원들이 봐도 찔릴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닐 것이다. 꼭 그들이 이 영화를 단체관람하기를 권한다. 위암으로 1년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선고를 받은 와타나베 시민과장은 그간 습관적으로 살아온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막상 죽음을 앞두고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한다. 구로사와는 첫 장면에서 충격적으로 이 사람을 설명한다. “그는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입니다.” 곧 죽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평생 의지처로 생각하며 살아온 아들과 소통을 시도해보지만 아들 내외의 반응은 차갑다. 노인을 귀찮아 하며 아버지의 돈으로 독립할 생각만 하고 있다. 와타나베는 우연히 만난 소설가와 흥청망청 환락을 맛보며 생을 느껴보려 한다. 그러나 곧 더 피곤해지고 더 쓸쓸해진다. 그는 사무실에서 일하던 젊은 여직원과 데이트를 함으로써 슬픔을 잊고 생기를 얻으려 한다. 그러나 그녀는 곧 그와의 만남을 지루해한다. 헤어지면서 그녀는 와타나베에게 자신이 봉제공장에서 인형을 만들듯 뭔가 만들어내는 일을 해보라고 한다. 그때 그는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는 사무실로 뛰어간다. 시민들의 민원을 받는 시민과. 그러나 시민과에 시민들이 찾아오면 다른 과로 보내는 게 업무의 전부였다. 그 다른 과는 또 다른 과로 보내고 그래서 결국은 민원인들이 포기하고 돌아가게 하는 것이 관청이 해오던 일이었다. 와타나베는 상습 침수 구역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민원을 접수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현장 답사를 나간다. 또 윗사람들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보고하고 어린이 공원 조성을 관철하기 위해 발로 뛰어다닌다. 마침내 공원이 지어지고, 눈이 내리는 날 밤 그 공원에서 와타나베는 그네를 타며 숨을 거둔다.
영화 '살다'의 한장면<br />
이야기는 여기서 끝날 법 한데, 구로자와는 조금 더 이어간다. 와타나베의 상가에서 벌어지는 장면은 아주 희화적이다. 공원 건설이 주민들의 지지를 받자 선거의 득표를 노리는 부시장이 자신의 공로로 가로챈다. 그의 휘하에 있는 공무원들은 모두가 와타나베의 공로임을 알고 있지만, 한 마디도 못하고 부시장에게 찬사를 보낸다. 일본의 상례(喪禮)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보는 게 좋으리라. 1950년대 일본의 상가(喪家)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우리는 상주가 곡을 하고, 조문객이 바로 가서 고인에게 절을 하고 유가족에게 위로를 표시한뒤 일어서서 식당으로 가서 술과 음식을 먹는데, 일본은 상주를 가운데 두고 두 개의 열을 만들어 상을 차려놓고 참배객들이 앉아 차와 술을 마신다. 부시장이 일이 생겨 먼저 일어나자 그때부터 말단 공무원들이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자 그 위의 공무원들이 입을 막으려고 한다. 그러나 한 사람씩 자신이 보았던 와타나베의 이야기들을 꺼내고 결국은 모두가 와타나베처럼 새롭게 살기로 다짐한다. 눈물을 흘리며 그간의 관성적인 삶을 반성하며 얼싸안는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출근한 그들은 다시 똑같은 기계의 일을 하고, 민원인 따돌리기와 책임 떠넘기기를 한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영화 '살다'의 한장면
나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모른다. 와타나베는 그 나머지 삶을 잘 살았는가. 그것도 모르겠다. 다만 무기력한 시대를 향해 죽비를 내려치고 싶은 구로자와의 기분은 알겠다. 하지만 각각의 타성이 일반화되어 있는 조직이라면, 그것은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살아있는가’를 묻는 감독의 심문은, 지금 우왕좌왕하는 일본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그 우왕좌왕에 좌왕우왕으로 흔들리는 이 나라엔 또 어떤 의미일지.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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