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알바시네]22. 악마는 왜 프라다를 입는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포스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그런 책과 그런 영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게 떠오른 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였다. 그런데 주술(主述) 관계가 똑 떨어지지 않는다. 파우스트가 프라다를 입기 위해 영혼을 팔아야 그럴 듯 한데, 아예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다니. 일단 ‘영혼을 파는 구닥다리 스토리’ 따윈 잊어버리자. 그냥 악마와 프라다의 희한한 의미 고리나 즐기자. 프라다를 입은 악마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악마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보았는가. 악마는 흉측하고 기괴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면, 당신은 악마의 유혹에 대한 감각이 없는 사람이다. 악마는, 비교하기는 좀 그렇지만, 천사보다 훨씬 매력적이어야 정상이다.(악마와 천사가 하는 일을 비교해보면 그렇단 얘기다.) 천사가 동대문 패션을 입었다면, 당연히 악마는 프라다를 입어야 한다. 그래야, 원단 악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 해서웨이

무료한 휴일에 용산 전자상가에 들렀다가, 이를테면 악마를 만났다. 영화 디브이디 석 장을 만원에 팔고 있다. 살며시 손을 뻗쳐 사과를 따는 이브처럼, 나는 유혹적인 물건에 손을 댄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그 사과 중의 한 알이다. 세계 최고의 패션잡지 회사 편집장의 2등 비서로 들어간 한 여자의 죽기살기 체험담이다. 실화라고 한다. 젊고 풍성해서, 앤 해서웨이가 나쁘진 않지만, 내가 반한 건, 독하고 나른한 여자 메릴 스트립이다. 물론 처음에 고생 ‘직싸리’ 하는 초짜 비서 편이었지만, 영화를 관통하면서, 패션계의 빠싹한 프로페셔널인, 노련하고 시크하고 자부심 짱인, 스트립에게로 돌았다. 특히 그녀가 해서웨이의 파랑 ‘털쉐타’ 색깔을 보고, 그 색깔이 처음 생겨나고 유통되는 패션 흐름에 대해 설명할 때, 뿅 갔다. 어수룩한 온정주의 따윈 아예 키운 적이 없어서, 내내 그녀는 속물처럼 보이지만, 그게 어때서?라고 묻고 싶어진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한 장면

영화는 그런 점에서 내 이마를 쳤다. 속물? 그게 어때서? 다시, 장 보들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를 펼친 것도 그 질문이 시킨 짓이다. 그 학자는, 오직 세상사람들의 히프를 고민하는 의자 제조업자의 진지한 고뇌를 내게 보여주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부분적 집착에, 이 소비사회의 광기와 진실이 있다. 한편 오래 전 읽은 젊은 비평가의 문학평론 속의 말이 생각난다. 우리가 부자를 경멸하게 된 것은, 가난한 작가들이 저마다 작품 속에다 돈을 깔보고 자본주의의 질서 따윈 아랑곳 않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들이야 말로, 세상 모르는 얼치기이며 세상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는 사기꾼이라고 못박았다. 돈에 대한 경멸은, 저들이 지닌 뿌리깊은 콤플렉스의 소산일 뿐이란다. 책 바깥으로 나오면, 물신(物神)이 하느님인데, 저 혼자만 책 안에서 흘러간 하느님을 불러제치고 있는 자야 말로 정신병자가 아니냐고까지 말했다. 좀 과격하지만, 고개 끄덕여지는 대목이 있다 싶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

메릴 스트립은 말한다. 앤 해서웨이가, 그 명성과 성공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구요,라고 말했을 때. “그런 사람이 어딨어? 겉으론 그렇게 말할지 모르지만, 모두가 우리같이 되기를 원해. 이 거리에 있는, 세상사람 모두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한 장면

해서웨이는 이 말에, 보란 듯 그녀를 떠나버린다. 이 영화는 거기까지가 한계다. 우리가 악마에 대해 진저리만 쳤지 실은 그 매혹적인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이 없듯이, 프라다 또한 섣부른 경멸이 그 브랜드가 생산한 사물의 진상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악마가 환장할 만큼 아름답듯, 프라다 또한 그럴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악마와 잘 사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듯, 프라다와도 그렇다. 그러나, 그 경멸만이 진짜라고 말할 순 없다는 얘기다. 속물이라고 우리가 섣불리 재단하는 행위에는, 우리의 오래된 위선이 잠재하고 있을지 모른다. 삶 속에선 이미 슬그머니 폐기 처분했으면서, 단지 구호로, 혹은 장식으로 늘 달고 다니는, 낡고 모호한 ‘정신주의’ 따위.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한 장면

결국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도, 힘껏 벗어제쳤지만, 채 다 못벗고 다시 살짝 걸쳤다. 물론 해서웨이가 선택한 그 순박하고 만족스런 삶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그건 그것대로 보호되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건, 기껏 프라다로 멋낸 악마가 사람을 홀딱 벗겨놓고, 속옷만 도로 입히는 게 우습다는 얘기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한 장면

어쨌거나 그래서 내 눈을 휘둥그레지게 한 그 화려하고 현기증 나는 세계를, 영화가 막판에 후닥닥 디스카운트해준 덕분에, 내가 현실 속에서 환장하지 않고 안정감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서비스니까, 그걸 맛보였으면 됐지 너 또한 그렇게 살지 않으면 쪼다,라는 메시지를 집어넣어 관객을 괴롭힐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한 장면

다만, 속물, 혹은 사치, 혹은 물신이라고 불리는 것들로 채워진 현실을 이제 툭 까놓고 들여다보고 담론화하는, 그런 솔직한 문학 예술 철학 종교가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팁을 준 것 만도 어디냐?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한 장면

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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