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하 NH농협은행장
최근 고려 말에서 조선으로 국가 교체기를 다룬 대하드라마 '정도전'이 인기리에 방영 중이다. 올해 들어서는 유난히 역사적인 사건들도 많이 일어나고 있다. 젖먹이 때부터 부모처럼 길러준 고모부를 단번에 처형한 북한의 일이 그렇고, 국민이 선거로 뽑은 총리를 위헌으로 몰아붙여 해임 결정한 태국의 헌법재판소가 그렇다. 이런 드라마에서나 있을 법한 사건들을 접하면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곱씹어 보게 된다. 잠시 고려 말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당시 중원에서는 주원장이 1368년 명을 세우고 원을 북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고려 왕실과 권문세족들은 시대를 읽지 못하고 명을 치겠다고 '요동정벌'이라는 무리수를 두었다가 결국 이성계에게 나라를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1388년의 일이다. 시대 흐름을 오판한 사례는 조선 역사 속에서도 여러 번 발견된다. 1592년 임진왜란도 조선이 일본의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해 대비하지 못했으며, 임진왜란 이후 중국의 명ㆍ청 왕조 교체기에도 인조와 반정공신 서인세력들은 명에만 매달리고 청을 배척하는 등 시대적 오판을 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미 만주족 누르하치가 후금(훗날 청나라)을 세우고 명나라를 세차게 몰아붙이고 있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이에 대한 정당성 확보가 시급했던 조선의 서인세력들은 청을 배척하다가 1636년 병자호란을 맞게 된다. 이로 인해 남한산성에서 버티던 인조가 결국 이듬해 지금의 잠실 부근인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 로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야 만다. 이로부터 250여년이 지난 19세기 후반, 조선은 쇄국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미국, 프랑스, 영국 등의 개항 요구를 거부하고 쇠퇴해가는 청에만 매달렸다가 결국 나라를 잃었다. 아무리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중국 왕조가 바뀌는 약 250여년의 시차를 두고 한반도에서도 이렇게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는 걸까? 토지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의 역사는 200년이 넘어서면 지탱하기 어려워진다는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우리 한반도에서도 쿠데타에 준하는 1623년 인조반정을 포함하면 약 200여년의 차를 두고 절묘하게 입증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조선 건국기의 역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인조가 광해군처럼 청과 적극적인 외교를 했다면,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미국이나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문명을 앞장서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근대에 들어 산업과 정보 통신의 발달로 역사의 반복 주기가 계속 짧아지고 있다. 최근 한반도를 둘러 싼 국제정세도 100년 만에 다시 반복되는 듯하다. 일본은 군사력을 확대하고 있고, 중국은 국제 사회의 맹주로 급성장하고 있다. 크림반도를 자국 영토로 재편입하고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노리고 있는 러시아도 예전의 러시아가 아니다. 특히 지난달 20일 상하이 정상회의에서 중국 시진핑 주석과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손을 맞잡고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은 동아시아에 미ㆍ일 동맹과 중ㆍ러 연합이라는 새로운 구도가 형성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세계 경제나 금융 시장도 마찬가지 흐름을 보이고 있다. 수십년의 경기 순환 사이클이 최근에는 10년, 5년 단위로 짧아지며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은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언자는 과거'라는 말을 남겼다. 역사적 교훈이나 개인적 경험들이 미래를 예측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이겠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인간이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선택이 쉽겠지만, 신은 인간에게 그런 능력은 주지 않았다. 역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갖는 우리 모두에게 미래를 읽을 수 있는 선각자적 혜안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김주하 NH농협은행장<ⓒ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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