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명 논설위원
서구에서 '백열전구 갈아 끼우기'라는 농담이 유행한 적이 있다. "백열전구를 갈아 끼우는 데 몇 사람이 필요할까?"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으로 구성되는 농담이다. 예를 들어 고지식하고 어리석은 집단에서는 세 사람이 필요하다. 한 사람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새 백열전구를 머리 위로 붙들고 서있으면 나머지 두 사람이 사다리의 두 다리를 각각 잡고 빙글빙글 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농담이 다양하게 변형되다가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버전이 생겨났다. "그린스펀 같은 중앙은행 총재라면 몇 사람이 필요할까?"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그가 백열전구를 붙들고 서있으면 온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해서 돌 테니까." 1987년 8월부터 2006년 1월까지 무려 18년5개월 동안 연준 의장으로 재직하면서 세계경제를 쥐락펴락한 그의 위상에 대한 풍자다. 이 그린스펀 버전을 약간 비틀어 적용하면 한은 버전도 만들 수 있겠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해 5월 이후 지난달까지 9개월 연속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그런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연간 1.3%, 올해 들어서는 1월과 2월 두 달 연속 연율 1.1%에 머물렀다. 올해와 내년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에 대한 한은의 전망치는 2.3%와 2.8%로 더 높다. 그래도 물가 추세가 한은 스스로 설정한 중기 물가안정목표(2013~2015년 3년간 연간 2.5~3.5%)에는 체계적으로 미달한다. 하지만 한은은 연 2.5%의 기준금리를 꽉 붙들고만 있다. 한은은 매달 금통위 회의가 열리는 날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중기 물가안정목표는 말 그대로 중기적 시계(視界)에서 달성하려는 목표이지 꼭 그대로 하겠다는 게 아니다." "국내총생산(GDP) 갭이 당분간 마이너스 상태를 유지하겠지만 그 폭이 점점 축소될 것이며 기대물가도 높으니 앞으로 물가가 오를 것이다." 마치 중기 물가안정목표와 기준금리를 백열전구처럼 붙들고 서서 경제 전체가 돌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일반인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지키지도 않을 중기 물가안정목표라는 것은 왜 설정해 발표하나?" "그러려면 물가의 상한만 설정하지 왜 하한까지 설정하나?" "이래서야 한은이 앞으로 새로운 중기 물가안정목표를 발표한들 누가 믿을까?" 한은은 이런 의문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기대물가'니 '중기적 시계'니 하는 말은 나름대로 이론적 근거가 있더라도 다수 국민에게는 꿰어맞추기를 위한 변명으로 들린다. 중앙은행의 금리정책은 금융시장과 산업계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일반 국민의 가계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소득에서 얼마나 소비하고 저축할지, 빚을 더 낼지 줄일지 등에 대한 가계 의사결정에 영향을 준다. 노동조합은 금리와 물가 추세를 감안해 임금협상 방침을 정한다. 그러니 중앙은행의 의사소통 대상에서 노동자를 포함한 일반 국민을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는 자신의 말발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중앙은행이 보내는 시그널을 일반 국민과 시장이 새겨듣지 않고 잡음으로 취급한다면 그 중앙은행이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불통총재'로 불리던 김중수 한은 총재의 임기가 이달 말 끝난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임에 정통 한은맨 이주열 전 부총재를 지명했다. 의외의 변수가 돌출하지 않는 한 그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무난히 통과할 것 같다. 총재 교체를 계기로 한은이 중기 물가안정목표제 존폐 여부를 재검토하고, 존치한다면 그 운용방식을 어떻게 개선할지를 고민했으면 한다. 이것이 우선 신뢰를 받게 돼야 한은의 소통력이 강화될 수 있기에 하는 말이다. 이주명 논설위원 cmlee@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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