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돈기자
김보경기자
김민영기자
7일 오전 8시50분. 윤 할아버지는 어김 없이 로타리 낚시회를 찾았다.
출근길 바쁜 걸음이 뜸해진 오전 8시50분. 신금호역(서울 금호동) 버스정류장 옆에 자리 잡은 '로타리 낚시회'. 윤 할아버지(78)가 어김없이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선다. 오늘은 옅은 베이지색 점퍼에 회색 중절모까지 한껏 차려입었다. 2주 전 막내딸이 사다준 것이란다. 비슷한 연배의 가게 주인은 "왜 또 와"라고 심드렁하게 내뱉으면서도 손은 어느새 커피를 탄다. 윤 할아버지는 주인의 핀잔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라일락 담배 하나를 꺼내 문다. 가게 주인은 종이컵에 탄 믹스커피를 내밀며 "또 피운다. 또 피워"라고 쏘아붙이고는 담배 뺏는 시늉을 한다. 윤 할아버지는 그의 손을 피해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이놈이 형님한테 까분다"며 아무렇지 않게 담뱃불을 붙인다. 윤 할아버지가 종묘광장공원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14년째 반복되는 아침 풍경이다.담배를 한 모금이나 빨았을까. 할아버지의 허리춤에서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린다. 서울 망원동에 사는 세 살 아래 친동생의 전화다. "나도 까먹고 있었는데 이놈이 용케 알고 전화를 했네. 점심 사주러 온다네." 허허 웃는 윤 할아버지. 이틀 뒤가 윤 할아버지의 78번째 생일이다. #SCENE② 9:20 버스윤 할아버지는 한결같이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자리에 앉는다. 운전기사도 이미 그를 잘 알고 있는 눈치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를 고집하는 것은, 삶이 흐트러지는 것이 두려워서 일까. 버스에 탄 그는 고개도 잘 돌리지 않고 묵묵히 내릴 정류장만 기다렸다.
앉은자리에서 담배 두 개비를 태운 할아버지는 30여분 만에 가게를 나섰다. 늘 같은 시간이니 정류장에 앉은 지 그리 오래지 않아 버스가 도착한다. 7212번 녹색 지선버스. 버스는 할아버지가 타기 편한 위치에 정확히 멈춰 섰다. 늘 앉던 앞에서 두 번째 자리는 지정석이 된 지 오래다.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할아버지. 모두 열세 정류장, 25분이 걸려 종묘공원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이렇게 윤 할아버지는 14년째 같은 시간 같은 노선의 버스를 타고 공원으로 '출근'을 한다. 아내가 폐섬유증으로 꼬박 7년을 앓다 세상을 떠난 게 2000년. 그때부터 할아버지의 '출근'은 휴일도 없이 계속됐다.#SCENE③ 10:00 종묘공원지난달 11일 윤 할아버지가 맞수인 유 할아버지와 장기를 두고 있다.
공원에는 일찍 '출근'한 또래 노인 30여명이 장기와 바둑을 두거나 옆에서 훈수를 두면서 구경하고 있다. 잠시 그 틈에 껴 장기를 구경하던 윤 할아버지는 공원을 나와 종로성당 뒤편 노점으로 향한다. 골목을 지나면서 장기판을 숨겨놓은 그만의 비밀의 장소를 살짝 열어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날은 평소 먹던 1000원짜리 야채 크로켓 대신 500원짜리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두 시간 후면 동생과 점심을 해야 하니 미리 배를 채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평소 윤 할아버지는 밥에 물을 말아 아침을 해결한다. 이날도 이틀 전 직접 지은 밥에 물을 말아 열무김치를 얹어 먹었다. 또 보통 때 점심은 인근 슈퍼에서 1050원을 주고 컵라면을 사 먹거나 노점에서 1000원짜리 빵을 사 먹는다. 노점 간이 의자에 앉아 30여분 동안 커피를 마시고 다시 공원을 한 바퀴 돈다.저편에서 장기 맞수인 유 노인이 알은체한다. 장기판이 벌어졌다. '한(漢)나라'를 잡은 윤 할아버지는 30여분의 공방 끝에 '포(包)'로 유 노인을 이겼다. 며칠 전 석패를 보기 좋게 복수했다. 내친김에 한 판을 더 두던 윤 할아버지가 갑자기 일어선다. 동생의 전화를 받고서다. 뛰다시피 걸어 공원을 빠져나온다. 버스정류장에 서있는 동생이 보이자 그제야 걸음걸이를 늦춘다.#SCENE④ 12:00 뷔페형 기사식당6개월 만에 만난 동생과 눈인사를 한 뒤 윤 할아버지가 앞장서 걷기 시작한다. 10여분을 걸어 도착한 한 귀금속 상가 앞. "맛있는 것 사드린다니까 여기는 왜 왔데?" 동생의 핀잔에도 윤 할아버지는 "여기가 맛있어"라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간다. 5000원짜리 뷔페형 기사식당. 두 사람은 접시에 흑미밥과 콩나물 무침, 호박볶음, 브로콜리, 오이소박이, 부추전 등을 담고 국그릇에 순두부를 담았다. 말 없이 밥을 먹던 동생이 "맛있네요"라고 운을 띄우자 신난 윤 노인은 "여기가 싸고 맛있어"라며 웃음 짓는다. 식사를 마친 동생이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사 온다. "식사는 잘하죠?" "요새 몸은 어때요?" "애들은요?" 쏟아지는 동생의 안부에 윤 할아버지는 "괜찮아, 괜찮아"라고 짧게 답한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 속의 대화가 오갔다.#SCENE⑤ 13:30 다시, 그 공원동생과 점심을 먹고 다시 공원으로 돌아온 윤 할아버지가 공원을 산책하고 있다.
그렇게 짧은 동생과의 해후를 마치고 윤 할아버지는 다시 공원으로 돌아왔다. 공원은 오전보다 많은 100여명의 사람들로 북적인다. 오전에 장기를 같이 두던 유 노인이 보이지 않는다. 장기를 두는 대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서서 30여분 동안 말 없이 장기를 구경한다. 장기를 구경하다 힘에 부치면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오후 4시가 가까워졌다. 말 없이 일어나 공원을 빠져나온 윤 할아버지는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아침에 탔던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 아침보다 5분이 더 걸려 신금호정류장으로 돌아왔다.#SCENE⑥ 17:00 집 앞 골목윤 할아버지는 서울중앙병원(구 복음병원) 뒤편의 빌라 3층에 혼자 산다. 젊었을 때 남대문시장에서 시계점을 하고 소금 무역상을 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었다. 그나마 막내딸은 가끔 얼굴을 보지만 다른 자식들은 연락이 닿은 지 오래다. "그놈 얘기는 꺼내지도 마." 아들 얘기를 묻자 손사래를 친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차마 더 묻는 것도 실례다 싶다.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할아버지의 걸음으로 15분. 병원이 보이는 골목에 들어서자 말 없이 걷던 할아버지가 뒤따르던 기자에게 몸을 돌리며 인사를 건넨다. "내일 또 봐."<div class="break_mod">◆윤 할아버지(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