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정종오 기자] 많은 일을 했는데 빛은 나지 않았다. 박근혜정부 초대총리인 정홍원 국무총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 총리는 지난 28일 이른바 '총대'를 맸다. 국정원 댓글 사건과 북방한계선(NLL)을 두고 정부의 입장을 밝히는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총리 스스로 한 것이다. 정치적 논란이 되고 있는 민감한 사태에 대해 직접 나섰다. 총리실 복수의 고위관계자는 "(대국민담화문은) 총리께서 먼저 제안을 했고 청와대가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검사 출신인 정 총리가 수사 중이고 법적 판단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 전문가적 시각에서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고 대통령의 부담도 덜어주는 역할을 자처한 셈이다. '책임 총리'의 역할론에 스스로를 위치시켰다.
▲정홍원 총리.[일러스트=이영우 기자]
◆일인지하(一人之下)=조선시대 영의정과 지금의 국무총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왕과 대통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자리. 일인지하는 시대에 따라 변했다. 영의정은 왕의 판단만 살피는 게 아니라 당파싸움이 한창 진행 중일 때는 관료들의 눈치가 더 중요했다. 지금이라고 달라진 건 없다. 총리는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는 게 아니라 청와대 각료의 움직임은 물론 국회 활동까지 예의주시해야 한다. 그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다가는 '그림자 총리'에 머물고 만다. 있으나 없으나 한 존재로 떨어지기 십상이다.대표적인 게 진영 전 장관 항명파동사태였다. 기초연금을 둘러싸고 청와대와의 불협화음으로 진 전 장관이 사퇴카드를 꺼냈을 때 정 총리가 나섰다. 면담을 통해 사퇴를 만류하고 진 전 장관이 끝내 업무에 복귀하지 않자 '복귀하라'고 명령도 내렸다. 그러나 진 전 장관은 돌아오지 않았다. 총리의 적극적 개입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와 진 전 장관의 갈등을 중재하지 못했다. 국무위원에 대한 제청권과 해임건의권이 있는 총리의 역할이 빛을 잃고 말았다. 청와대 각료들의 파워에 밀려 버렸다는 평가이다. ◆만인지상(萬人之上)=많은 국민들이 우러러보는 자리. 정 총리는 지난 2월26일 취임식에서 "겸허하고 낮은 자세로 국민들께 다가가 열심히 듣고 소통하는 국민 총리가 되겠다"고 강조했다. '국민 총리'를 강조한 정 총리는 지난 9월11일 송전선로와 송전탑으로 첨예한 갈등을 겪고 있는 밀양을 직접 찾았다. 갈등의 현장에서 답을 찾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만인지상다운 결정이었다. 정 총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반쪽 총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반대하는 주민들과 대화 자리에서 밀양 주민들은 "정부에 속았다"며 5분 만에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반대주민들은 "소통하는 국민의 총리가 아니라 이미 다 결정해 놓고 정부의 입장만 전달하기 위해 총리가 왔다"며 격앙된 모습을 보였다. 끝내 주민 설득은 실패했고 공사는 강행됐다.'책임·국민 총리'와 '그림자·반쪽 총리' 사이에서 정 총리의 평가는 지금 평행선을 긋고 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는 고독한 자리일까. 한 사람의 신임을 받고 뭇 백성들의 존경까지 받는 자리. 이해 관계자의 얽히고설킨 지금의 정치·사회 환경에서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취임 8개월을 지난 정 총리 스스로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밀양현장 방문을 마치고 KTX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던 길. 당시 어둠이 내리는 창 밖을 홀로 무심히 쳐다보고 있던 정 총리의 모습이 떠 오른다. 세종=정종오 기자 ikokid@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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