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국문화재보호재단
<명인명품> 장인시리즈 <17>. 여성국극·발탈재담 장인 조영숙[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여든을 앞둔 할머니는 천진난만한 소녀 같았다. 등골이 휘어 작은 몸집이 더욱 작아 보이지만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밝고 경쾌했다. 격변의 근현대사 속에서 60년 넘는 세월을 배우로, 재담꾼으로 살아온 그에게서 우리나라 전통 연희의 '꺼지지 않은 불씨'를 지피려는 충만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지금은 명맥만 간신히 이어지고 있는 '여성국극', 그리고 발에 탈을 씌우고 춤을 벌이며 재담을 나누는 '발탈'. 이 두 가지 무대에서 명인 조영숙(79ㆍ여ㆍ사진)씨는 화려한 입담과 창으로 한때 수많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던 예인이었다. 영화와 TV가 물밀듯 들어왔던 1960년대 이후 여성국극이 쇠퇴기를 맞고 난 뒤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발탈' 보유자로, 제자 일 곱명을 십여년 동안 가르치며 매년 한 두차례 조촐한 공연을 보여주고 있다. "좋은 스승 밑에서 좋은 제자가 나옵니다.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죠. 임춘앵 선생님 밑에서 연기와 소리를 배울 수 있었죠. 그게 제가 발탈을 할 수 있었던 힘이자, 지금 가난하고 어렵지만 제자들을 키워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하죠."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조 씨는 북한 원산에서 성장했다. 좌-우익 갈등이 첨예했던 시절, 친척 중 일부가 우익에 연루돼 고향인 전남 화순에서 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아버지는 '심청가'로 세상에 명성을 알리던 독보적인 명창 조몽실 선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방랑벽이 심했고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어머니는 고명딸인 조씨를 절대로 '광대딸'로 만들지는 않겠다고 했었다. 그래서 원산에서 사범학교엘 갔다. 그러던 중 해방에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원산에서 평양, 그리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조 씨는 또다시 좌우대립 속에 죽음의 위기를 피해 광주로 올라간다. 광주에서 생활하면서 생전 처음 여성국극을 보게 됐다. 그의 나이 열여덟 살일 때였다. 남자 분장을 한 여자 배우들의 연기와 춤, 열광하는 관객들의 분위기.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 그 날의 강렬한 인상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그는 임춘앵 선생이 활동하는 '여성국극동지사'를 찾아갔고, 본격적인 연기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놀랍게도 아버지 조몽실 선생과 다시 재회하는데, 조 선생은 동지사 단원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조씨보다는 열 살 위였지만 어른스럽고 당찼던 임춘앵 선생은 당대 최고의 여성국극배우였다. 조씨는 그가 "스승으로 훈련할 때는 무섭고 엄격했지만 함께 생활할 때는 따뜻한 언니 같았다"고 회고한다. 임춘앵 선생으로부터 연기를, 아버지에겐 소리를 배우며 조 씨는 배우로, 재담꾼으로 성장했다. 여성국극이 자취를 감추고, 조 씨가 빈털털이로 어렵게 살아갈 때 부친과 친구 사이였던 발탈 명인 이동안 선생과 연락이 닿았다. 평소 조씨의 재담과 연기를 눈여겨봤던 이동안 선생이 발탈 중에서도 '재담'을 이을 사람이 바로 조영숙이라는 이야기를 TV프로그램에서 밝힌 게 계기가 됐다. 이렇게 해서 조씨는 이동안 선생께 발탈을 사사하고, 다시 무대위로 오르게 됐다. 발과 손으로 연기하는 탈꾼과 재담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발탈은 전통연희 중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종목이다. 하지만 여성국극이 사라진 가운데 '발탈'은 조씨가 쌓아온 국악ㆍ배우 인생에 찾아온 새로운 기회였다. 다행히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조씨는 탈꾼과 재담꾼 역을 모두 소화해가며 매년 무대 위에 공연을 올리고 있다.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힘 닿는데까지 제자들을 기르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발탈도 여성국극도 공연판에서 변두리로 밀려났지만, 이런 전통연희들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간이 언젠가 만들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사회문화부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