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서]제대로 된 실패

8월 마지막 날 캠퍼스를 벗어나 근교 산촌으로 학과 워크숍을 떠나고 있었다. 같은 시간 태평양 건너편에서는 다이애나 나이어드라는 예순 네살 할머니가 쿠바에서 플로리다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꼬박 53시간 동안 177km를 수영해 이틀 후 플로리다 남단 키웨스트에 도착했다. 이로써 나이어드는 플로리다-쿠바 해협을 최초로 헤엄쳐 건너간 '사람'이 되었다. 사람에 따옴표를 한 것은 스포츠에서 대개 최초나 최고 기록은 남자들 차지인데 이번 기록은 남녀 통틀어 최초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번 기록이 놀라운 것은 먼저 상어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보호망 없이 이룩한 것인 데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물 밖에 나오지 않고 수영한 것이다. (장거리 수영에서는 식사나 건강 체크를 위해 보트에 잠깐 올라갔다 다시 수영하는 소위 '단계적 수영'도 기록에 포함된다.) 예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 이틀 꼬박 헤엄을 친 것도 놀랍지만 더욱 대단한 것은 이번이 다섯 번째 시도 끝에 성공했다는 사실이다. 칠전팔기도 있는데 네 번 실패가 무슨 대수냐 싶겠다. 하지만 나이어드의 네 번 실패는 그 하나하나가 '제대로 된' 실패였다는 점에서 놀랍다. 사람은 실패를 무수히 하지만 제대로 된 실패는 한 번 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네 번의 시도에서 나이어드는 스스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준비되었다고 판단하여 물에 뛰어 들었고, 몇 시간 수영하다 그만 둔 게 아니라 40여 시간 넘게 분투를 하다 포기하였다. 2011년 네 번째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후 열린 나이어드의 TED 강연을 보면 사람이 얼마나 우아하고도 위엄있게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절실히 다가온다. 제대로 된 실패라 하면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경험을 쌓는 것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는 제대로 된 실패가 아니다. 제대로 된 실패란 적당히 실망하고 좌절해서 뭔가 고쳐보겠다 깨닫는 정도가 아니라 그 충격과 파장이 너무나 근원적이어서 도저히 고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는 그런 차원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실패는 그로부터 일부러 배우는 게 아니라 그로 인해 배워질 수밖에 없는 필연을 내포한 것이다. 최근 국가연구개발사업 평가에서 '성실 실패 (honorable failure)'라는 용어가 회자되고 있다. 기본 취지는 진취적인 연구 목표를 향해 열심히 연구했으나 결과가 잘 나오지 않은 경우 평가에 있어 불이익을 면하게 해주는 것이다. 도전적인 연구일수록 불확실성이 더 크기 때문에 성실 실패를 용인함으로써 연구자들이 더 독창적인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문제는 성실 실패와 불성실 실패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이다. 성실히 연구했으나 환경 등 외적 요인으로 실패한 것인지, 제대로 연구를 하지 않아서 실패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상 확실히 가려내기 어렵다. 설사 체계적인 연구노트 작성이나 차질없는 연구수행 일정 등 확인할 수 있는 요소로 평가한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성실히 연구를 수행한 행위만 판단하는 것이지 근본적으로 연구의 목표나 내용이 얼마나 도전적이고 창의적인지 가늠하는 것은 아니다.  성실 실패 제도가 그 취지대로 운영되어 의욕적인 연구자들이 마음놓고 모험적인 연구를 시도하려면 궁극적으로는 연구개발 평가자나 평가기관이 '적당한' 실패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제대로 된' 실패에 대해서는 관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거꾸로 되면 실패를 통해 배운다는 미명 하에 설익은 연구프로젝트가 급조되어 아까운 시간과 자원이 낭비되고, 정작 달팽이가 언젠가는 바다를 건널 것이라는 거대한 믿음과 끈기로 지식과 기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연구는 여전히 요원할 것이다.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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