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접했던 아주 훈훈한 장면이 지금껏 여운이 남는다. 여당의 어느 중진 의원이 그보다 더 중진의 의원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를 신문의 카메라가 잡은 것이었는데, 그 메시지에서 여당의 핵심으로 분류되는 그 중진 의원은 자신보다 더 중진인 의원에게 "형님!"하며 정겨운 우애를 과시했다. 무척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그것은 삭막한 정치의 세계에서 형제애를 이뤄 낼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었다. 우리 정치에도 순박함과 정겨움이 살아 있음을 발견케 해 준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동기애를 넘어서 냉철해져야 하는 정치의 세계에서 이 순박한 '형제'들이 어떻게 버틸지 염려가 들었다. 저 순박함과 우애로는 비정한 정치와 공무를 감당하기 쉽지 않을 듯한데, 동정과 연민을 금할 수 없었다. 연민을 넘어 이들에게 맞는 직업을 구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에 '형제관계'를 선진적으로 이뤄 낸 집단이 발달해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모두가 형제인 끈끈한 집단, 의리-비록 의(義)와 리(理)가 아닌 의식주의 의(衣ㆍ유난히 검은 옷을 즐겨 입지 않는가), 이익의 리(利)이긴 하지만-하나로 뭉친 집단이 있다는 것이 무척 다행스러웠다. 왜 이들로 하여금 많은 '형'과 '아우'를 갖는 다복을 누리게, 맘껏 '호형호제'를 하게 해 주지 못했을까. 참으로 미안했다. 이런 미안함은 엊그제 방송에서 내보낸 대기업 사모님의 청부살인 보도에서 판사 출신 사위를 봤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보기에 그는 이 '범죄'의 주범은 아닐지라도 이 '사건'의 사실상 주범이었는데, 그러나 자기 보신 외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없는 그에게 나는 분노나 화보다는 가련함이 들었다. 최고 엘리트인 그는 그러나 지극히 미숙한 아동기의 의식에 머물러 있었다. 엄중한 법복의 권위로 몸을 휘감아도 감출 수 없는, 정서와 윤리의식에서의 미숙아인 그에게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법관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워야 했던가. 우리 사회, 우리의 사법제도가 그에게 저지른 '횡포'였다. 이제라도 우리의 잘못을 돌이켜 보자. 가련한 저 정치인들과 그 판사, 그리고 그들처럼 감당하기 힘든 역할과 지위로 힘들어하는 다른 수많은 이들, 그들에게 진짜로 어울리는 직업을 구해 주고 뒤늦게나마 유치원 교육을 시켜 주자. 그것이야말로 다른 어느 복지보다 시급한 '복지'가 아니겠는가. 그것이 조금이나마 우리의 미안함을 씻는 길이 아니겠는가.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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