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3장 화실이 있는 풍경 (64)

그들과 오버랩 되어 하림의 머리 속으로 혜경의 모습이 비쳤다. “가난하고 고생하며 사는 건 두렵지 않아. 그냥 이렇게 내 생이 고정되어 버리는 것이 더 두려워. 아침에 눈을 뜨면 만나는 똑같은 사람, 똑 같은 일, 똑 같은 뉴스....”그날 혜경은 나란히 누운 채 독백이라도 하듯 말했었다.“내 것이 아닌 세상의 물결에 휩쓸린 채 모래시계처럼 빠져나가는 나의 생이 두려워. 세상은 나를 이미 자기에 맞게 튜닝을 했고, 난 그 속에서 꼭두각시가 되어 살고 있는 느낌이야.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이라면, 이렇게 늙어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그리고 난 이 대한민국 서울이 싫어졌어. 아니, 무서워. 어딜 보나 시멘트 벽 뿐이지. 시멘트 콘크리트로 만들어놓은 거대한 감옥처럼 말이야. 아니면 무덤이든가. 그 속의 구멍마다 다들 몇 억 몇 십억 하며 들어앉아 있는 걸 보면 꼭 모두 이상한 마술에 취한 사람들 같애. 잘 산다는 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어. 난 차라리 붉은 모래 바람이 휘휘 날리고, 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풍경이 더 편안해 보여......”그녀 역시 망명 정부를 꿈꾸는 것이었을까? 혜경을 생각하자 하림은 자기도 모르게 깊이를 알 수 슬픔에 빠져들었다. 어쩐지 모든 것들이 자기를 떠나 영영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이 들었다. 모든 것이 막연해졌고, 모든 것이 안개 속에 가라앉아 버린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 자기 혼자 멀리 떠내려와 낯선 별에 와 있는 느낌도 들었다. 사방은 물 밑처럼 조용하였고, 가끔 어둠 속 저 물리서 개 짓는 소리 같은 게 들려오고 있을 뿐이었다.하림은 일어나 빈 노트를 꺼내와 다시 배를 깔고 누워 생각에 잠겼다. 아까 하소연이를 바래다 주러 나갔다가 본 별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둠 속에 잠겨가던 그녀의 등이 생각났다. 조금 있다가 먼저 <별>이라고 썼다. 하림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노트 위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별을 본다.어릴 적 보던 별나이 들어 본다.저 별에도 내 나이 만한 시간흘러갔으리.내 가슴 속 수 많은 별 뜨고 지는 동안,내 이름 위수 많은 꽃피고 지는 동안,별을 헨다.어릴 적 헤든 별 나이 들어 헨다. 그리고나서 하림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동안 그대로 있었다. 밤비라도 내리고 있는지 처마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투닥투닥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김영현 기자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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