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⑪

‘영산 철학원’ 영감에게서도 어쩐지 그런 망명정부의 냄새가 났다.영감이랑은 미장원이랑 이층 화장실을 같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하림은 오다가다 몇 번 마주 친 적이 있었다. 칠십대 중반 쯤 되는 코가 길죽하고 눈까풀이 눈을 반쯤 가리고 있는 약간 음침한 인상의 늙은이였다. 그를 보면 하림은 어쩐지 거미집 속 깊숙이 들어 앉아있는 늙은 거미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하림이 시를 쓴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화장실에서 마주치면,“거, 혹 정지용이 아남?”“김기림이라고는 아남?”하고 지나가듯이 하림이 교과서에서나 본 시인의 이름을 대는 것이었다. 그리곤 하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는데 워디루 갔는지 사라져버렸어. 없어졌어.”하고 애석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영감은 그렇지 않아도 심심하던 차였던지, 오줌을 누러 올라온 하림을 붙들고 자기 사무실로 데려가 차를 대접해주며 이런 저런 말을 시켜보았다.이층 맨 끝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손님 대기실과 감정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창문을 모두 푸른 페인트로 칠해 놓아 낮인데도 거미집처럼 침침하고 어두웠다. 벽에는 천체지도와 해부도, 두꺼운 한문책과 독수리 박제 같은 장식물로 빽빽이 차있었다. 천체 지도 아래엔 겨우 무릎을 끼고 앉을 만큼의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엔 낡은 탁자가 놓여 있었다.자기 말로는 가끔씩 별짜리 마누라도 사람들 몰래 검정 세단을 타고 ‘감정’을 받으러 온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그런 경우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도 하림이한테는 왠지 남 다른 호감을 보이곤 했는데, 그것은 하림이 미장원집 사장 혜경이 애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혜경의 말에 의하면 영감은 젊은 시절, 사상범으로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다고 했다. 혜경은 영감이 밤에 혼자 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방음이 잘 안 되는 벽을 통해 들려오는 그 울음소리는 음산하고 처절해 처음엔 귀신이라도 나타났나, 하고 무척 놀랐다고 했다. “어두워. 자네를 보면.....”철학원 원장인 영감이 말했다.탁자 위에는 한 눈에 보아도 조잡해 보이는 중국제 화병이 놓여 있었고, 화병에는 양귀비처럼 붉고 현란한 조화가 한 묶음 담겨 있었다. “밝게 살어. 어차피 사람 운은 태어날 때 정해져 있으니까.” 그러면서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탁자 위에 벗어두고, 눈을 깊게 내리깔고는 일회용 커피를 맛있게 홀짝거리곤 했다.그러다간 또 생각난 듯이,“정지용이 아나?”“김기림이 아나?”하고 습관처럼 물었다. 그런 그의 몸에서도 망명객의 외로움이 물씬 풍겼다. 어쩌면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그렇게 망명객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글 김영현/그림 박건웅<ⓒ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사회문화부 정종오 기자 ikokid@ⓒ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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