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강인수 선생의 손녀 강영월씨…한국 생활 16년만에 대한민국 국적 취득
[아시아경제 지선호 기자] "남들은 교회에서 기도할 때 '죽어서 천국가게 해달라'고 하는데 어머니는 '죽어서 한국가게 해달라'고 하셨죠"독립유공자 강인수 선생의 손녀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 강영월(55·여)씨는 함께 있던 아들의 우스갯소리에 미소를 지었지만 눈가는 촉촉이 젖어있었다. 대한민국 사람이 되신 것을 축하한다는 말에 그는 연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를 반복했다. 강씨에게는 할아버지의 흔적이 없다. 강씨가 열한 살이던 지난 196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할아버지와 관련된 유품을 모두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남은 가족들을 위한 아버지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강인수 선생은 약관의 나이에 만주로 망명해 1920년에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과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 또 만주에 흩어져 있던 각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고 한족연합회를 결성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정부는 지난 1990년 강인수 선생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강씨 가족은 자연스럽게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던 곳에 정착했다. 중국 흑룡강성에서 태어난 강씨는 길림성에서 자랐다. 그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조선족'으로 컸다. 중국 안에서 한국의 문화를 간직한 조선족으로, 또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살아가려면 때때로 목숨을 걸어야 했다. 1966년부터 76년까지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에 독립유공자 후손은 '죄인' 취급을 받았다. 이 때문에 할아버지와 관련된 자료는 모두 숨겨야 했다. 강씨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강씨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했던 이유도 가족들이 혹시나 고초를 겪게 되지 않을까 염려한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강씨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그 때까지 봤던 유품 밖에 없다. 할아버지의 손글씨가 적혀있던 노트와 흑백사진 그리고 아버지가 해주던 할아버지에 관한 얘기다. 강씨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이야기 해주며 말미에 “너는 기회가 되면 반드시 할아버지의 고국인 한국에 가서 살라”고 항상 말했다.강씨가 대한민국 국적을 받기까지 우여곡절도 있었다. 16년전 국내에 들어온 강씨는 2년전 영주권을 받기 전까지 장기불법체류자 신분이었다. '할아버지의 나라', '잘사는 나라' 한국에서 살아야겠다는 막연한 목표를 가지고 들어왔지만 그 때까지 강씨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자란 중국인이었다.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면 영영 한국에 돌아올 수 없다는 생각에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한국에서 지냈다. 국가유공자 후손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는 사실도 중국교포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 목사님을 통해 불과 몇 년 전에 알았다. 한국 영주권을 취득하면서부터는 중국에 있던 두 아들도 국내에 들어왔다. 첫째 아들은 이미 강씨처럼 국가유공자 후손 신분으로 6개월만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둘째도 곧 한국 국적을 취득한다. 남편도 중국에서 들어오면 온 가족이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정착할 계획이다. 강씨는 "처음에 한국에 들어올 때 여기서 쫓겨나면 바다에 빠지겠다는 각오로 들어왔었다"며 "새로 태어난 기분으로 이제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고 말했다. 한편, 광복절을 앞둔 지난 13일 법무부 주관으로 열린 '독립유공자 후손 대한민국 국적 취득 수여식'에는 강씨 이외에도 부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박도백 선생의 손자 박승천씨(46), 러시아에서 민족해방운동을 펼쳤던 김아파시나 선생의 손녀 김율리아씨(35) 등 12명의 독립유공자 후손이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지선호 기자 likemor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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