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철의 그림살롱 106회 | 서양화가 영희 ‘매혹’ 시리즈
도도한 여인, 91ⅹ61㎝ mixed media on canvas, 2011.
감미로운 솜사탕처럼 햇살이 나뭇잎 사이 가득 부서진다. 껴안을 수 없다지만 화사함이 안겼다. 본디 외톨이는 없다. 하여 그립다. 당신의 긴 머릿결, 은은한 초록솔잎 향!마지막 이삿짐을 정리하던 여인에게 그녀가 흑장미 한 다발을 안고 들어섰다. “사각의 기다란 보랏빛 꽃병을 우연히 봤어요. 환영해요. 우리 좋은 이웃이 됐으면 해요.” 이마에 땅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커다란 눈동자의 여인은 약간의 당혹감으로 하얗게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지었다. “참 놀랍군요. 마치 예전부터 알고 계신 것처럼…. 저 꽃병엔 흑장미만 꽂았답니다.”수줍게 응답하는 동안 그녀는 어느새 능숙한 플라워 코디네이터처럼 잎들을 정리했다. “정말 멈출 수 없을까요. 검붉은 빛깔의 정열을. 가끔 장미에게 묻고 싶을 때가 있어요. 꽃잎 한 장에 운명을 걸 듯 물들이니까요.”여인은 초록사과 모양의 동그란 작은 화분에 노랗게 핀 애기달맞이꽃을 창가로 옮기다 돌아보며 가볍게 말을 건넸다. “아참, 우리 차 마실까요? 커피도 있고, 목련 차, 레몬도 있구요.”그녀는 뭐든 좋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가볍게 들썩였다. 선량한 햇살이 목조바닥 거실로 귀엽게 들어왔다. 이를 마중하듯 우아한 자태의 싱그러운 장미들이 프리마돈나처럼 계절을 찬미했다. “레몬생강 에이드예요. 어떨지 모르겠어요.”생강 조각이 떠있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녀는 가볍게 한 모금 마시며 감동적인 표정으로 “음, 너무 좋군요. 상큼해요. 향도 풍부하고. 이렇게 생강과 잘 어울릴 줄은 몰랐어요. 놀랍네요.”
73ⅹ61㎝, 2010
두 여인은 그제서야 서로의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 맛있는 차(茶)를 알게 해준 답례라며 음반을 선물했다. 슈만의 연가곡, 여인의 사랑과 생애(Frauenliebe und Leben)가 순결한 물음처럼 흘렀다. 잎맥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같이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은 공간에 떠도는 고독들을 위로했다. 그때 그녀는 천천히 애송시를 암송했다. “사랑-, 침을 삼키는 순간 절박한 영원에의 욕망이 별 상처없이 몇 달쯤 녹아내리고/올라선다-황홀한 신앙이여-!”<고트프리트 벤(Gottfried Benn) 詩, 사랑>
65ⅹ50㎝, 2012
잠시 갈망의 방울들이 비가 되어 입맞춤할 것 같은 그런 정적이 흐른다. “동네 제과점, 일용품을 사러갈 때도 가끔 만나게 되죠. 그런데 바보처럼 자꾸 떨리는 걸요. 좋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만 커져가고….” 말을 하면서도 더듬거리는 여인의 손을 따뜻하게 잡으며 조용히 그러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녀가 건넸다. “저 흑장미처럼 멈출 수 없을 거예요. 나도 그랬었죠. 그러니 놓치지 마세요. 사랑은 용기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어요. 지금, 지금하세요.‘당신의 눈동자에 장미꽃이 만발했다!’라고.”이코노믹 리뷰 권동철 기자 kdc@<ⓒ 이코노믹 리뷰(er.asiae.co.kr) - 리더를 위한 고품격 시사경제주간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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