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블로그] ★들, CEO에게 군기 잡히다

[아시아경제 이정일 기자] "목소리가 그게 뭡니까. 더 크게 복창하세요."빨간 모자의 조교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렸다. 땀으로 범벅이 된 A 부장의 얼굴에 일순 긴장감이 엄습했다. '이번에 걸리면 또 선착순인데…' 이를 악 물어보지만 허사다. 몇시간째 이어진 훈련에 다리는 이미 맥없이 풀렸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는 말도 이 순간만큼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최근 병영체험을 실시한 모 기업 A 부장이 사석에서 밝힌 무용담은 결국 '애사심'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겨우 이틀간의 훈련이었지만 죽을 만큼 힘들었던 경험이 역설적으로 '내 동료, 우리 회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각인시켜줬다는 얘기다. 기업들의 연례행사로 자리잡은 병영체험은 취지가 명확하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조직원들의 인내심과 승부 근성, 그리고 동료애를 키우겠다는 것이다. "힘들었지만 소중한 경험"이었다는 A 부장의 고백은 병영체험이 결코 소모적인 행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사실 기업은 그동안 군대에서 참 많은 것을 배웠다. 군사용어인 '전략'(strategy)과 전술(tactics)이 언제부턴가 기업의 일상 용어로 자리잡은 것은 단적인 예다. 경영진 회의에서 '총성없는 전쟁'이라는 살벌한 용어가 난무하고 손자병법이 기업전략 수립의 참고서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군대를 스승으로 삼은 모양새다. 하지만 최근 이같은 흐름에 역전 현상이 감지되고 있다. 군대가 오히려 기업으로부터 한수 배우기 시작하면서다. 지난 달 16~17일에는 해군 장성들이 기업인들로부터 경영 전략을 듣는 '해군 장성단 기업경영 연구 워크숍'이 열렸다. 연사는 김신배 SK 부회장, 이희범 STX 회장 등이었다. 지난 해에는 공군 장성단이 기업인들에게 한 수 배웠다. 내년엔 육군 장성단 차례다. 이같은 군의 기업 배우기 열풍은 무엇 때문일까? "천안함 사태 등 군의 위기 대응 실패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지적이 나온 후 기업 경영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군 관계자의 발언에 해답이 숨어 있다. 기업의 위기 대응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이다. 따지고보면 군대는 실전 기회가 많지 않지만 기업은 매일매일 전쟁을 치른다. 군대는 피아(彼我) 구분이 명확하지만 기업은 그렇지 않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기 일쑤다. 협력관계였던 삼성전자와 애플이 특허 혈전을 벌이고 경쟁 관계였던 퀄컴과 노키아가 동지애를 과시하는 것은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냉혹한 현실을 반영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넘어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패배다. 뒤로 한발 물러서면 천길 낭떠러지다. 이런 절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은 무섭게 진화하고 있다. 군이 기업으로부터 배우려는 것은 이같은 생존 본능이자 필승 전략이다. 기업인을 향한 '별'들의 경례는 연일 사투를 벌이는 '전사'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이정일 기자 jaylee@<ⓒ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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