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영철 기자] 국내 이공계 최고의 지성인 카이스트(KAIST) 학생이 또 자살했다. 올 들어 네 번째다. 지난 1월 이후 한 달에 한 번 꼴로 자살사고가 일어난 셈이다. 4월은 카이스트에게 이렇듯 잔인한 달로 다가왔다. 베르테르효과(모방자살)에 대한 우려와 함께 성적에 따른 차등 등록금제 등 카이스트의 ‘무한경쟁’ 시스템에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7일 오후 6시30분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을 비롯한 최병규 교학부총장, 이균민 교무처장, 이승섭 학생처장이 침울한 모습으로 대전 카이스트 본관 기자회견장에 들어섰다. 서 총장은 무거운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카이스트는 개교 이래 최대위기를 맞고 있다. 구체적인 사유를 불문하고 있어선 안될 일들이 카이스트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금의 상황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학부모님들께, 학생들께 머리 숙여 죄송하다는 말씀 드린다”며 고개를 떨궜다. 7일 오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인천 남동경찰서는 이날 오후 1시20분께 인천 남동구 만수동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카이스트 수리과학과 2학년 휴학생인 박모(19)군이 숨져있는 것을 요구르트배달원이 발견, 신고했다고 8일 밝혔다. 경찰은 박군이 혼자 아파트 19층에서 내리는 장면을 CC(폐쇄회로)TV 화면에서 확인하고 그가 투신자살한 것으로 잠정결론을 내렸다. 박군 아버지는 경찰조사에서 아들이 성적이 떨어져 고민이 깊었다고 진술했다. 김동수 카이스트 수리과학과장은 “박군이 예전 상담과정에서 ‘대학에 와서 공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면서 “심리적 부담이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박군은 최근 병원에서 우울증진단을 받았고 지난 6일 휴학했다. 박군의 죽음은 일단락될 듯 보이던 카이스트학생들의 잇단 자살사건을 다시 물 위로 떠오르게 했다. 박군이 숨지자 카이스트 안팎에선 이 학교의 지나치게 경쟁적인 학사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로 들끓고 있다. 서 총장이 2006년 7월 부임한 후 수업료, 기숙사비 전부를 국고로 대주던 기존 제도를 깨고 성적에 따라 수업료 일부를 내도록 하는 ‘징벌적 수업료제’와 전 과목 영어수업 등 이전까지 없었던 개혁적 정책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징벌적 수업료제에 따르면 평점이 3.0 이상인 학생은수업료가 면제된다. 하지만 평점 2.0~3.0 미만이면 0.01점당 약 6만원씩을 본인이 내야한다. 평점 2.0 미만이면 수업료 600만원과 기성회비 150만원을 전부 내야 한다. 이에 따라 해마다 재적인원(학부기준 약 5000명)의 10% 안팎이 등록금부담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성적이 나쁘면 수업료부담 외에 ‘낙오자’란 패배감에도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박군이 숨지기 하루 전인 지난 6일 카이스트교정 내 게시판엔 학교정책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기도 했다. 학생들은 대자보를 통해 ‘성적에 따라 수업료를 차등지급하는 미친 등록금정책,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재수강제도를 비롯한 서 총장의 무한경쟁, 신자유주의적 개혁정책은 단순히 학업부담을 가중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말도 안 되는 학내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이 학교에서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고 토로했다. 7일 오후 긴급회장회견장에 나타난 서 총장이 마침내 백기를 들었다. “2007학년도 학부 신입생부터 적용돼온 일정 성적 미만 학생들에 대한 수업료부과제도를 다음 학기부터 없앨 계획”이라고 밝혔다. 4년의 학사기간 중 수업료면제를 원칙으로 하겠다는 얘기다. 개혁 전으로 되돌아가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 학생평가도 GPA(학교내신) 평점내용을 성적만 적용하는 게 아니라 창의성 등 다른 항목을 더해 손질할 계획이다. 또 교학부총장을 중심으로 비상대책위원회서 학교의 전반적 문제에 대한 개선안 등 학생정신건강과 학사제도를 다시 검토해 새 학기부터 적용키로 했다.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안 된다’며 학교변화를 이끌었던 서 총장의 개혁이 ‘지금까지 방식으론 안 된다’는 또 다른 장벽 앞에 가로막힌 셈이다. 카이스트 출신의 한 교육계 관계자는 “어린 나이에 대학에 진학해 공부에만 몰입하다보니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경우가 적잖아 예전에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며 “이공계 학문자체가 ‘1등 연구자’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경향도 학생과 연구자들에게 많은 압박감을 준다”고 말했다. 이영철 기자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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