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찬주씨가 2005년 여름 전남 순천 조계산 불일암에서 법정스님을 만나 법문을 듣고 있다.
[아시아경제 성정은 기자]작은 수첩과 카메라. 그것이면 족했다. 법정스님의 발자취를 따라 송광사 불일암, 봉은사 다래헌, 길상사 등을 찾았다. 지난해 여름부터 꼬박 1년을 혼자 걸었다. 그가 법정스님의 수행처를 밟아가며 찾은 건 '자기다움'을 지키라는 법정스님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1991년 세상에 살되 물들지 말라는 뜻의 법명 '무염(無染)'을 받고 법정스님의 재가제자가 된 소설가 정찬주씨다. 정씨는 지난해 여름 법정스님의 수행처를 따라 걸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같은 해 4월 법정스님의 일대기를 담은 '소설 무소유'를 펴낸 그지만 법정스님과 25년 동안 이어 온 인연을 다 담아내지 못했던 아쉬움이 컸던 탓이다. 정씨는 법정스님이 머물렀던 수행처를 고스란히 따라 걸으며 법정스님이 곳곳에 남긴 흔적을 되짚어봤다. 그는 이번 여행길을 두고 '순례길'이라 했다.
송광사 불일암의 서전(西殿)에서 정찬주씨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떠올렸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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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의 순례길은 송광사 불일암에서 시작된다. 불일암은 정씨가 법정스님을 처음 만난 곳이자 법정스님에게 법명을 받고 제자가 된 곳이기도 하다. 사람의 손만으로 터를 닦고 목재와 자재를 산 아래서부터 지게질로 올려 만든 불일암 서전(西殿)에서 정씨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떠올렸다. 서전에 전기, 전화, 수도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법정스님의 당부를 기억하며 정씨는 법정스님의 말은 문명의 과잉 때문에 청빈과 덕이 상실되는 것을 경계하라는 뜻이었을 거라고 생각해본다. 불일암 다음으로 찾은 해남 우수영. 법정스님의 고향인 해남을 찾기 전 정씨가 꼼꼼히 살핀 건 일기예보였다. 일부러 눈이 오는 날을 기다렸다가 떠나기 위해서였다. 법정스님이 출가를 결심하고 집을 나선 날에 싸락눈이 내렸음을 그는 잊지 않았던 것이다. 법정스님의 속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보고 싶었다는 정씨는 눈발을 맞으며 법정스님이 목포로 가는 배에 올랐던 부두를 향해 걸었다. 정씨는 그 부두에 서서 출가란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크게 버리고 걸림 없는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도 쌍계사, 법정스님이 수행자로서 첫 발을 내딛었던 미래사 효봉암, 가야산 해인사로 이어진 정씨의 순례길은 법정스님이 '무소유'를 집필한 봉은사 다래헌에 멈춰선다. 정씨는 법정스님이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머문 다래헌에서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반독재 운동에 나선 법정스님의 모습을 기억해본다. 법정스님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본업은 수행자인데 눈앞에 불이 타고 있어 불가피하게 소방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정씨는 거칠어져가는 마음을 글로 다스리려 했던 법정스님과 법정스님이 1971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무소유'를 되돌아본다.
법정스님이 창건한 길상사. 정찬주씨는 이 곳에서 자신의 가르침에 갇히지 말고 자기다움을 지키라는 법정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겨본다.
법정스님이 1992년 거처를 옮겨간 강원도 오두막 수류산방, 길상화 보살에게 대원각을 시주받아 1997년 개원한 절인 길상사로 발길을 돌린 정씨는 그 곳에서 법정스님의 가르침을 새롭게 깨닫는다. 법정스님은 생전에 '석가모니 부처님도 한 분이면 족하다'고 했다. 상좌든 신도든 자신의 가르침에 갇히지 말고 자기다움을 지키라는 가르침이다. 법정스님은 자신을 맹목적으로 좇는 사람보다는 자신의 질서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을 더 신뢰했다. 정씨는 순례길의 끝에서 자기만의 개성을 꽃 피우라는 법정스님의 말을 되새기며 조용히 되뇐다.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성정은 기자 jeun@<ⓒ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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