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쉼터, 창덕궁 후원에서 가르침을 찾다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에 있는 주련. '雲近蓬萊常五色(운근봉래상오색)'. 신선이 산다는 봉래궁처럼 궁궐이 항상 드높고 상서로운 오색빛을 띠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사진=이재문 기자 moon@

[아시아경제 성정은 기자] '왕도(王道)'라는 낱말이 있다. 왕이 가야할 길을 의미하는 이 단어의 뜻은 인간이 배워야 할 가치의 최고봉을 의미하는 것이다.이 멋진 가치를 지닌 왕도를 만나고 싶다면 우선 걷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왕의 후원이다. 그리고 멋진 생각의 바다에 빠질 다이빙 포인트에 이르면 반드시 '이것'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금언(金言)이다. 예로부터 귀족들은 자신의 자녀에게 매일 이것을 베껴와 하루 한수씩 읽어주며 마음의 수양으로 삼게했다. 그 전통이 이어진 것이 조회(朝會)다. 맑은 아침정신으로 수양해 귀에 담고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반성하며 마음에 새기는 것이 이것이다. 유독 왕만이 숨겨진 비경을 따라 걸으며 보고, 신하들과 문답을 나누며, 하루를 되새겨보게 하는 이 명구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해 왕의 명으로 기둥에 새겨 오래 물려 온 것이 오늘 지식의 주인공인 바로 '주련(柱聯)'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일까? 사람의 마음을 잡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일까? 사람의 말이다. 말 때문에 설화(舌禍)를 입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창덕궁 후원을 거닐어보는 게 어떨까. 사대부 살림집의 구조를 본떠 만들었다는 연경당 건물 동쪽에 자리한 정자 기둥에 이런 글귀가 있다. '임금 조서는 글이 아름답게 빛나고 궁궐에는 말씀 조용하시네'. 임금이 말을 아끼고 태도나 행실에서 모범을 보이는 걸 찬양하는 말이다. 말보다 중요한 게 행동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세상살이에서 중요한 게 말과 행동뿐이랴. 말은 아끼되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인사는 정치에서 기업 경영에까지 중요치 않은 곳이 없다. 인사청문회에 나온 고위 공직자 후보들에게 칼날 같은 질문이 쏟아지고, 대기업 임원 인사가 나면 그 인사가 앞으로의 기업 경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내다보는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다 인사의 중요성 때문이다. 대통령부터 각급 기관장,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까지 인사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정에 앞서 역시 창덕궁 후원을 거닐어 보시라. 연경당 건물을 찾아가 안채 뒷편 기둥앞에 서면 나랏일에 쓸 사람을 기용하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주는 선인들의 글귀를 만날 수도 있다. 왕의 쉼터로만 알려진 후원(後苑)은 사실 이 같은 삶의 가르침이 가득한 지혜의 보고다.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는 일상 속 멋을 찾고 싶다면 후원 건물 곳곳의 기둥을 잘 살펴보면 된다. 한시 구절을 세로로 써 붙인 '주련(柱聯)'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주련은 인격 수양과 관련한 한시 구절부터 아름다운 풍광을 읊은 것까지 다양한 내용의 글귀를 개인의 집, 사찰, 궁궐 등 생활 공간 곳곳 기둥에 걸어놓은 장식물이다. 선인들 생활 문화의 자취이기도 하다. 지난 9일 주련에 담긴 선인들의 가르침을 들으려 창덕궁 후원을 찾았다.

연경당의 동쪽 돌계단 위에 자리한 농수정

◆'말'보다 값진 '행동'을 일깨우다=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려 창건됐다고도 전해지는 연경당의 동쪽 돌계단 위에 자리한 농수정(濃繡亭). 이 정자의 현판을 바라보고 서면 양쪽 기둥에 붙은 글귀가 한눈에 들어온다. '五色天書詞絢爛(오색천서사현란) 九重春殿語從容(구중춘전어종용)'. '오색의 임금 조서는 글이 아름답게 빛나고, 구중궁궐 봄 전각에는 말씀 조용하시네'로 풀이되는 이 글귀는 임금이 나랏일을 훌륭히 수행하고 태도나 행실에서 모범을 보이는 걸 찬양하는 말이다. 옛 사람들은 임금의 언행이 진중하고 과묵한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말' 때문에 시끄러운 일이 많은 이 시대를 사는 정치인, 기업인을 비롯한 우리 모두가 이곳을 찾아 말보다 값진 게 행동이라는 농수정 주련의 가르침을 한 번 쯤 가슴에 새겨볼만 하다.

어떤 사람을 쓸 것인지. 인사의 중요성을 담아낸 연경당의 주련.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다= 농수정을 내려와 연경당 안채 건물로 들어서면 인사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글귀를 찾아볼 수 있다. 안채 뒷편으로 돌아들어갈 때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기둥을 잘 봐야 한다. '兩京名詔皆高士(양경명조개고사) 四時和氣及蒼生(사시화기급창생)'. '온 나라에 훌륭한 인재를 천거해 올리라는 명을 내리니 그에 응해 온 인물들이 모두 인격이 높고 성품이 깨끗한 선비들이어서 온화한 기운이 백성에게까지 미친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을 쓸 것인가. 인사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주련은 고위 공직자 내정자가 청문회를 하기도 전에 사퇴하는 등 '사람 심는' 문제로 고민이 깊은 우리 사회에 값진 교훈을 준다.◆갈등을 푸는 법은 '덕(德)'에 있다= 여야가 대립하고 노사 갈등이 끊이지 않는 우리 사회. 말과 인사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 외에 이런 얘기는 어떨까. '盛世娛遊化日長(성세오유화일장) 群生咸若春風暢(군생함약춘풍창)'. '태평성세에 즐겁게 놀며 덕화의 날은 기니, 온갖 백성 교화되어 봄바람 화창하네'로 해석되는 이 글귀는 임금의 교화가 잘 이뤄진 세상에서 태평한 삶을 누리는 백성들의 모습을 그렸다.

존덕정의 주련. '盛世娛遊化日長(성세오유화일장) 群生咸若春風暢(군생함약춘풍창)'

덕화는 옳지 못한 사람을 덕으로 변화시키는 걸 뜻하는데, 여기선 '덕화의 날이 길다'는 표현을 써 갈등을 풀 때는 권력이나 돈이 아닌 '덕'으로써 감화를 줘야한다는 가르침을 전한다. 이 주련은 반도(半島) 모양을 한 연못을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한 육갑 겹지붕 정자, 존덕정(尊德亭)에서 만나볼 수 있다. ◆멋과 운치 모르면 우리 조상님 아니다= 후원을 거닐며 말에 대한 경계심, 인사의 중요성에 대한 충분한 가르침을 얻은 사람이라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자랑스런 문화유산이기도 한 창덕궁을 마음 놓고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선인들이 그런 사람들을 위해 효명세자가 들러 독서를 했다는 폄우사에 남긴 글귀가 있다. '絶壁過雲開錦繡(절벽과운개금수) 疎松隔水奏笙簧(소송격수주생황)'. '절벽에 구름이 지나가니 수 놓은 비단이 펼쳐지고, 성긴 솔이 물 건너 편에서 생황을 연주하네'. 정자를 둘러싼 나무들과 그 앞을 흐르는 물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한 이 글귀는 솔바람 소리를 아악에 쓰는 관악기인 생황 소리에 빗대 일상 속 운치를 즐긴 선인들의 생활 문화를 담아냈다. 주련은 농수정, 연경당, 존덕정, 폄우사 외에 창덕궁 후원 건물 곳곳에 붙어있으며 후원과 현종의 서재 겸 사랑채로 알려진 낙선재(樂善齋)에 있는 주련을 모두 합하면 181점에 달한다. 창덕궁 뿐 아니라 경복궁과 덕수궁에도 그 수는 적지만 주련을 찾아 볼 수 있다. 가르침을 얻고자 하는가? 선인들이 즐긴 일상 속 운치를 느끼고 싶다면 창덕궁 후원을 찾아 건물 곳곳의 기둥을 따라 걸어보자. 가르침을 얻을 것이며, 일상 속 멋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성정은 기자 jeun@사진=이재문 기자 moon@<ⓒ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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