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100년 미래경영 3.0 창업주DNA서 찾는다<13>아모레퍼시픽 서성환 회장②79년 주위 만류속 첫삽… 수익보다 차문화 부흥도순·서광다원 등 개간… 국내최대의 다원 조성
아모레퍼시픽이 제주도에서 운영하고 있는 설록다원.
[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차 사업은 당장 돈이 벌리는 사업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공하면 소비자나 국민한테 태평양의 이미지가 달라질 것입니다.계속 적자가 날 수도 있지만 내가 이 사업을 추진할 테니 여러분들은 지켜봐주세요."1979년 갑자기 소집된 이사회에서 장원 서성환 회장은 녹차사업을 공식화했다. 6·25 전쟁 이후 잇따라 히트상품을 출시하며 사업 다각화에 성공한 태평양 입장에서 차 사업 진출은 그야말로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회사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장원의 차 사업 결정은 유달리 식물에 관심이 많았던 장원이 이미 몇십년 전부터 구상하던 일이었던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녹차는 평생의 사업" = 장원은 사업상 외국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리고 그는 각 나라마다 전통차와 고유의 차문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사업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일본의 차까지 홀로 공부하던 이유도 그래서다. 장원은 생전에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우리나라는 차라는 게 없다"면서 "일본의 차 문화는 사실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것인데 그들은 그걸 다듬고 가꿔 세계에 자랑하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자신에게 차 문화부흥이라는 숙제를 내렸다."녹차 같은 문화사업은 우리보다 큰 대기업이 앞장서야 하는데 그들은 타산이 안 돼서 손을 대지 않아요. 이제 나라도 나서서 차문화를 보급하고 전파해야 되겠습니다."녹차사업에 뛰어든 장원은 차근차근 일을 진행해 나갔다. 먼저 사람을 구하고 땅을 구해 밭을 일궜다. 다음으로 시설을 세우고 기술을 도입해 판매에 나섰다. 평생을 기다린 사업이었기에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다원 조성 초창기 장원 서성환 회장이 직접 밭에 들러 녹차잎을 살펴보고 있다. 80년대 초 제주도 황무지 일대를 개간할 당시 장원은 이곳을 다니며 챙길 정도로 녹차사업에 큰 관심을 보였다.
◆집념으로 일궈낸 녹차 = 장원에게는 사람 '복'이 있었다. 회사 안에서는 연구실 출신의 서항원 씨로부터 전체 사업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조언을 들었다. 또 차나무 재배와 관련한 전문적인 기술은 제주도에 있는 허인옥 교수로부터 자문을 구했다. 허 교수와 장원은 이미 20년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런가하면 부지조성과 농원개간은 당시 제주도에서 농지관리를 하던 공무원 박문기 씨가 맡았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제주도 땅을 국내 최대의 다원으로 직접 손으로 일군 농부는 김원경 씨였다. 장원은 이들에게 자신의 평생 집념인 녹차사업에 대해 설명했고 이들 모두는 장원을 믿고 아낌없이 자신들의 힘을 보탰다.그렇지만 다원을 만들기 위한 부지를 선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단 대기업이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을 사들이는 것 자체가 주위에서 의심을 받았으며 현지주민들로부터 직접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1983년 시작된 제주도 서광다원 개간은 가장 큰 고비였다. 이곳은 제주도가 생긴 이래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땅으로 잡초도 자라지 않고 가시덤불 따위만 얼크러진 암반지대였다. 차가 들어갈 수 없어 일일이 사람들이 돌을 걷어내고 잡목을 뽑아내고, 다시 흙은 깔아야 했다. 장원은 그렇게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 수십만평의 다원을 일궜다. 경쟁 고려화학 돈공세… 정면승부 뚝심의 승리◆위기는 피하지 않고 맞선다 = 신뢰와 우직함을 앞세운 개성상인의 기질을 이어받은 장원이었지만 위기 땐 과감한 결정이 빛을 발했다. 다른 기업들은 엄두도 못 낼 대규모 공장을 건설한 일이나 후진적이던 국내 화장품 유통구조를 싹 뜯어고친 일도 장원의 과감성이 밑바탕이 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위기는 정면으로 맞섰다. 1960년대 초 장원은 프랑스를 다녀와 국내 최대 규모의 공장을 세우기로 결정했지만 막상 자금을 충당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공장 준공을 눈앞에 두고는 시장에서 '태평양이 망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경쟁업체였던 고려화학이 태평양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100만원 상당의 경품행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3000원 정도였으니 모두가 놀랄 만한 액수였다.공장설립으로 자금압박에 시달리던 장원은 맞수를 뒀다. 당시 태평양 매출의 1%에 달하는 200만원을 경품금액으로 내걸었다. 최초 국산승용차를 1등 경품으로 내세웠고 당시 샐러리맨 1년치 수입에 해당하는 5만원을 줬다. 경품행사는 4개월 가까이 지속됐다. 예기치 못한 반격에 고려화학은 당황했고 결국 1년 후 부도를 내며 업계에서 사라졌다. 장원의 뚝심은 업계에 두고두고 회자됐다. 공장을 완공한 태평양은 업계 선두를 확실하세 굳힐 수 있었다. 훗날 장원은 이 시기를 회상하며 "남다른 불굴의 집념은 기업인들이 갖춰야 할 무기"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가 고독한 승부사라고 불리는 이유다. 회사경영을 이어받은 서경배 현 사장은 부친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회사가 어려울 때, 회장님(장원)과 저는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회장님은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을 만들겠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화장품 외길이야말로 당신의 꿈이고 삶 자체여서, 화장품 없는 자신의 인생은 아무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말씀이셨습니다."최대열 기자 dychoi@<ⓒ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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