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용준 기자]새벽공기를 가르며 퍼지는 목탁소리는 절을 병풍처럼 감싼 천불산에 부딪혀 산울림을 만든다. 일주문을 호위하듯 둘러싼 산그늘에 번지는 싱싱한 초록. 아침부터 밀려오는 초봄의 따사한 햇살, 숲에 포근히 안기듯 자리한 운주사(雲住寺)에서 맞는 새해는 더 없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맑은 향내 묻어나는 바람에 마음을 비우는 사찰 운주사에 천불산을 지나던 구름도 잠시 머물다 흘러간다.새해를 여는 설날이 지나고 남쪽으로 부터 본격적인 봄 내음이 풍기기 시작한 이맘때 한 해를 시작하는 첫 여행지로 화순 운주사로 발걸음을 내딛었다.전라남도 한 가운데 쯤에 있는 화순은 사실 익숙지 않은 여행지다. 동쪽에는 아름다운 순천만이 흐르고 남쪽으로 녹차밭으로 유명한 보성, 북쪽으로는 소쇄원의 담양이 버티고 있다. 정작 화순에는 단박에 떠올릴 만한 여행지는 없다. 하지만 운주사를 비롯해 동북호의 푸른 물과 어우러진 화순적벽, 작은 저수지의 산벚꽃이 화려한 세량제, 쌍봉사의 철감선사 부도와 탑비 등 숨돌릴 틈도 없이 새로운 풍경을 불쑥불쑥 만날 수 있는 그런 곳이다.그중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는 최근 30%대의 높은 시청률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는 TV 드라마 '추노'의 촬영지로도 알려지면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설 연휴 고향길로 향하는 차량사이에 끼여 화순을 찾았다. 시골집으로 가는길과는 살짝 벗어나 있지만 운주사로 향하는 발길은 설레이기까지 하다.이름을 풀어보면 '구름이 머무는 절'쯤 되는 운주사(雲住寺)의 내력은 어느 사찰에서는 발견 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신비를 지닌 천년 고찰이다. 그래서 모든것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소박한 석탑들과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엉성한 조형미의 불상들. 지금은 18기의 석탑과 80기의 석불만 남아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런 석불과 석탑이 각각 1000기씩 있었다고 한다.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운주사 재천불산 사지좌우산척 석불석탑 각일천 우유석실 이석불 상배이좌(雲住寺 在天佛山 寺之左右山脊 石佛石塔 各一千 又有石室 二石佛 相背以坐)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운주사는 천불산에 있으며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는 내용이 있어 그때까지만 해도 석불 석탑이 1000개씩 실존했다고 볼 수 있다.일주문을 드는 순간부터 그곳은 부처의 땅이다. 계곡을 따라 오르면 여기저기 버려진 듯 보이는 돌탑과 돌부처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크기도 각각 다르고 얼굴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홀쭉한 얼굴형에 선만으로 단순하게 처리된 눈과 입, 기다란 코, 단순한 법의 자락이 인상적이다. 민간에서는 할아버지부처, 할머니부처, 남편부처, 아내부처, 아들부처, 딸부처, 아기부처라고 불러오기도 했는데, 마치 우리 이웃들의 얼굴을 표현한 듯 정감있고 친근하다.
이처럼 운주사의 석불과 석탑들은 산도 들도 아닌 만산 계곡 길가와 논밭에 소박하기 짝이 없는 생김새로 세월의 이끼를 껴입고 여기저기 서 있는 것이다. 과연 누가, 무슨 연유로 이런 석탑과 석불을 수없이 세워 놓았을까. 숱한 설화가 역사의 빈 자리를 메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신라말 도선국사가 한반도를 배의 형상으로 보고, 동쪽엔 산이 많지만 서쪽엔 산이 없어 이곳에 탑과 불상을 세워 균형을 잡았다는 이야기다. 운주사에서는 못생기고 비례가 맞지 않은 석불에서는 구원을 바라는 보통 사람들의 염원이 읽히고, 석공의 소박한 솜씨에서 진정한 불심이 느껴진다. 그래서 절집을 걷는 것은 그저 한 무더기 돌덩이를 만나도 그것이 탑이 되고 불상이 되게 하는 민초들의 간절한 마음들이 이뤄낸 천불천탑이 아닐까.서울에서 왔다는 이성건(49)씨는 "설을 맞아 뜻깊은 여행지를 찾다 천불천탑 운주사를 선택했다"면서"그 옛날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모습을 담은 석불과 석탑들을 보면서 올 한해를 힘차게 열고 싶다"고 말했다. 석탑들이 즐비한 중앙마당을 지나 서쪽 야산을 5분여 올랐다. 운주사의 상징이 되어버린 거대한 석조와불(미완성석불로추정)이 누워있다.조상 대대로 사람들은 이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뀐 뒤 1000년 태평성대가 이어지는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석조와불전망대에서 바라보면 2년전 큰불로 인해 상처를 입은 주변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불길은 와불 주위의 나무들을 모두 삼켜버렸지만 천만다행으로 와불과 석탑, 석불들은 용케 화마를 피했다. 지금은 그날의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가고 파릇파릇한 옷으로 갈아입은 나무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으면서 태평성대의 새 세상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하다. 화순을 찾았다면 세량제의 아름다움을 놓칠 수 는 없는 법이다.세량제는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1969년에 만들어진 작은 저수지다.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인터넷을 떠도는 산벚꽃이 만발한 봄날 물안개가 피어오른 세량제 사진을 떠올리며 찾았다.산벚꽃이 필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지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세량제의 풍경은 화려한 봄날 못지 않게 특별했다. 뾰족하게 서 있는 삼나무가 고요한 물에 반영된 풍경은 마치 북유럽의 호숫가를 연상켓 할 정도로 이국적이다.
(화순군제공)
세량제가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것은 2006년. 화순군이 이곳에 공원묘지를 조성하려고 하자, 네티즌들은 '한 폭의 수채화' '환상적' '몽환적' '무릉도원', '이국적' 등 다양한 표현을 쏟아내며 공원묘지 조성을 반대해 세량제가 주목을 끌기도 했다.저수지 주변 산등성이의 대형 송전탑과 전깃줄, 호수 위 산자락의 큰 묘지 등이 풍경에 방해가 되긴 하지만, 삼나무와 미동 없는 호수 등이 빚어내는 풍경은 "이곳이 우리나라인가" 싶을 정도로 독특한 그림을 만들어 준다.다가오는 봄날 카메라 하 나 달랑 들고 흐드러진 산벚꽃과 물안개가 어우러진 세량제를 찾아 이국적 풍경의 사진 한 장을 남겨보는것은 어떨까.화순=글ㆍ사진 조용준 기자 jun21@asiae.co.kr◇여행정보▲가는길=경부고속도 이용해 호남고속도로 갈아타고 가다 광주IC를 나와 제2순환도로를 돌아 29번 국도를 타고 가다 너릿재 터널을 지나면 화순이다.
▲볼거리=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유적지는 총 596기의 고인돌이 있어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온 듯 하다. 조선조 중종때 선비가 중국 적벽에 버금간다해서 이름을 붙인 화순적벽이 볼만하다. 동북호로 흘러드는 창랑천을 따라 노루목적벽, 보산적벽, 창랑적벽, 물염적벽을 통틀어 화순적벽이라 부른다.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쌍봉사 부도와 탑비 등도 찾아볼만 하다. 이외에도 조광조 유허비, 공룡발자국화석지, 연둔리 숲 등이 있다. ▲먹거리=한국최초로 검정콩으로 만든 두부를 특허낸 '달맞이 흑두부'(061-372-8465)는 담백하면서도 영양가 만점인 요리를 내놓는다. 맛깔스러운 쌈정식과 게장백반 등을 주메뉴로 내놓는 '둥근지붕'(061-371-3333) 등도 음식이 맛있다.<ⓒ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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