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 살둔마을ㆍ살둔산장-함박눈발속 찾아가는 고요한 나만의 시간
[아시아경제 조용준 기자]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시간의 야속함. 왠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을 파고드는 쓸쓸함. 옷 깃을 스며들어 목덜미를 휘감는 차가운 공기의 섬뜩함. 이맘때면 부닥치는 이런 저런 상념과 조급증에 지칠 즈음, 한 해의 마무리를 핑계 삼아 길을 나서보자. 시간의 속도에서 벗어나 자연의 속도로 살고 있는 곳, 오지로 말이다. 왠지 휑한 마음을 채워 주리라는 기대감을 안고서다.강원도에는 '3둔 4가리'라 불리는 오지마을이 있다. 홍천군의 살둔ㆍ월둔ㆍ달둔과 인제군의 아침가리ㆍ적가리ㆍ연가리ㆍ명지가리가 그곳이다. 모두 산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오지마을이다. '둔'은 둔덕, 즉 언덕을 일컫는 말로 산기슭에 평평한 땅이 있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임을 알리는 말이다. 가리는 계곡가에 사람이 살 만한 곳을 말한다. ◇살둔천 휘감아도는 아늑한 오지-살둔마을지난 주말 3둔의 첫 마을인 살둔을 찾았다.강원도 홍천군 내면 율전리 내린천 상류에 자리잡고 있는 살둔은 이름조차 생소하고, 혹시 들어보았다고 해도 심심산골 오지마을이라 비포장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하는 곳이다. 그러나 마을까지는 말끔히 포장이 돼 있었고 오지가 아닌 대처라 할만큼 찾기가 수월했다.인제군 상남면에서 미산계곡으로 들어서자 하늘에서 함박눈이 펑 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절경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2시간 30분 정도 왔을 뿐인데 어찌 이런 깊고 맑은 계곡이 있을까. 유장하게 내린천이 흐르고 그 물은 천(川)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게 깊고 깊다. 여기에서 그치면 비경이라고 할 수 가 없다. 계곡길을 따라 구비구비 산길을 20여분 달리자 살둔마을 간판이 모습을 드러낸다.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에 듬성듬성 자리 잡은 집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린천의 최상류인 살둔천이 마을을 휘감고 돌아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에 자리한 마을은 눈으로 살포시 파묻혀 있었다.1980년대까지 오지 여행가들 사이에서 '한국의 티베트'로 불렸고, 20여년 전만 해도 버스를 타려면 배를 타고 물길을 건너야 했다. 1999년에 446번 지방도로가 포장되며 오지의 면모는 벗고 있지만, 워낙 첩첩산중에 틀어박혀 있어 아직도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다.
그래서 이곳에 오면 누구나가 자연인이 된다. 무념ㆍ무상의 상태로 맹현봉과 군암산, 개인산의 정기를 그대로 받으며 내린천의 물줄기로 목을 축이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정도로 태초의 모습 그대로다. 이곳에 마을이 처음 생겨난 것은 조선시대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사람들이 숨어들면서 마을이 생겨난 것. 정감록에도 이 마을은 우리나라 피난처 7곳 중 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니 제대로 찾아든 셈이다. 실제 한국전쟁 당시에도 이곳 주민들은 전쟁이 일어났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방태산 줄기인 숫돌봉이 마을을 감싼 전형적인 산촌이지만 산이 평지를 내어주고 내린천이 물을 공급해줘 밭을 일구고 농작물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살둔마을은 겨울이 길다. 장장 6개월이나 이어진다. 이미 지난 11월중순 수북이 쌓일 정도로 첫눈이 내렸고, 얼음도 얼었다. 이곳에는 4월까지도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언다고 한다. 해가 저물어 가자 산골마을 사람들은 아궁이에 장작을 넣어 불을 지핀다.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자, 눈 덮힌 마을은 한결 더 정겹고 포근하게 다가온다.
살둔마을에는 아이들이 없어 폐교된 생둔분교가 있다. 폐교된 후 학교는 자연을 지붕삼아 텐트를 치는 사람들의 공간인 캠핑장으로 변했다. 도시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태호 사무장은 "가족 단위 캠핑객이 이곳을 찾아오기 시작하면서 학교는 다시 생기를 찾아가고 있다."며 "아침저녁 등ㆍ하교하는 아이들은 없지만 하루 이틀 이곳을 찾아와 머무는 아이들의 시끌벅적함으로 학교 구석구석 활력이 가득하다."고 말한다.◇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고 싶은 그 곳-살둔산장그저 포근한 산골마을 쯤으로 느껴지는 살둔마을이 유명하게 된 것은 따로 있다.과거 한 출판사가 '한국의 살고 싶은 100대 집'에 선정한 특이한 2층 건물의 살둔산장때문이다.
산장은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엮어 올리는 강원도 전통의 2층 귀틀집이다. 1985년 윤두선씨가 오대산의 월정사 복원작업에 참여한 도목수에게 특별히 부탁해 지었다.재미있는 것은 일제강점기의 한옥들처럼 2층 누각을 올렸다는 것. 사찰 건축 양식도 일부 도입되었다 한다. 이렇다 보니 건물 자체만으로도 눈에 띄는 명물이 된 것이다. 실제 초창기 살둔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어우러진 살둔산장을 찾아왔다고. 지금도 누구나 찾아가 머물고 싶어하는 장소로 이 산장이 손꼽히고 있다.그 사이 산장지기는 3~4차례 바뀌었지만 지금은 원래 토지 소유주의 집안인 차찬호씨가 맡아 운영 중이다.
산장을 찾았다. 산장은 영롱하도록 맑고 투명했다. 마당의 하얀눈은 눈이 부실 정도였고, 처마 밑의 고드름은 수정처럼 반짝거렸다. 집 뒤편 계곡의 숲엔 설화가 만개, 마치 연하장의 한 장면같은 풍경을 연출해내고 있었다.최근 수리한 방에 군불을 지피던 차씨가 따뜻하게 맞아준다.취재왔다는 기자의 말에 차씨는 살둔산장이 언론에 나가는것을 조심스러워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 번 좋다고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무슨 관광지마냥 함부로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있던 없던 들락날락 하거나 심지어 훼손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사람이 기대 살만한 곳이라고 해서 붙었다는 이름 살둔. 세상에 지친 사람들이 그곳을 등지고 살만한 곳이라는 뜻도 함축돼 있을것이다. 하지만 조금은 상식밖의 사람들로 인해 조용히 자신을 뒤돌아보고 자연과 함께 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살둔을 영영 잃어버릴까 차씨는 걱정이란다.그의 안내로 살둔산장에서 가장 운치있다는 2층 다락방으로 올랐다. 다락방의 이름은 '바람을 베고 잔다'는 뜻의 '침풍루'다. 나무바닥에 앉아 눈덮힌 계곡을 내려보는 그 맛은 가히 일품이다.
또 멀찌감치 떨어진 화장실 이름은 내린천에서 따온 '내린정'이다. 내린정 옆으로 난 계곡을 내려서면 소(沼)가 하나 있는데 이름이 재밌다. '호랑소'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소 위의 절벽에서 호랑이가 앉아 낮잠을 자다 그만 떨어져 죽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고보니 절벽의 모양이 예사롭지 않게 가파르고 암석 모양도 괴이하게 보인다. 눈 내리는 겨울밤, 살둔마을의 밤이 깊어간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와있다는 느낌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느낌. 눈내리는 소리가 사그락거리고 생둔분교의 촉수 낮은 백열등 불빛이 교실창문에서 흔들리고 있다.인제ㆍ홍천=글ㆍ사진 조용준 기자 jun21@asiae.co.kr◇여행메모△가는길=서울에서 양평을 거쳐 44번 국도를 타고 홍천을 지나 철정검문소에서 우회전한다. 451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 31번 국도를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상남방향으로 직진해 31번 국도를 타고 가면 상남면소재지다. 우회전해 미산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
△볼거리=맑은물과 자연의 모습 그대로 간직한 미산계곡의 절경을 빼 놓을 수 없다. 특히 '미산동천'이라고 새겨진 돌비석을 따라 샛길로 내려가면 새가 되어 넘어간다는 비조불통 계곡으로 들어간다. 또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개인산약수도 들러볼 만 하다.<ⓒ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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