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장 마지막날 영결식에서 현충원 안장까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이 열린 23일 새벽부터 온 국민의 가슴은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젖어들었다.이날 새벽 0시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김 전 대통령과 같은 고향 출신의 재경 신안군 향우회 회원 100여명이 준비한 노제가 치러졌다. 노제가 끝나고도 새벽이 되도록 국회 앞마당과 서울광장에는 자리를 뜨지 못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김 전 대통령을 회고했다. 아침이 밝으면서 영결식 준비로 바빠졌다. 오전 8시 국회 공식빈소가 폐쇄되고 국회앞도로에 임시분향소가 설치됐다. 미처 공식빈소를 찾지 못한 이들은 고인을 애도하기 위해 임시분향소로 발길을 돌렸다. 점심시간을 넘기면서 국회앞마당은 더욱 분주해졌다. 오후 1시30분부터 30분 가량 발인이 진행된후 곧바로 영결식이 엄수됐다.김 전 대통령의 살아생전 최고의 반려자이자, 지지자였던 이희호 여사를 비롯 홍일, 홍업, 홍걸씨 세아들 등 유족과 이명박 대통령 내외, 정치 라이벌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 헌법기관장, 주한 외교사절 등 각계 각층의 주요 인사들이 모여 김 전 대통령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당초 2만4000여명에게 초청장을 보냈지만, 일반시민에게도 영결식을 공개하면서 국회는 고인의 명복을 비는 시민들로 꽉 메워졌다. 뜨거운 날씨로 인해 이내 땀으로 범벅이 됐지만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기 위한 마음으로 조문객들은 자리를 지켰다. 영결식은 국민의례로 시작해 묵념, 고인의 약력보고 순으로 이어졌다. 이어 장의위원장인 한승수 국무총리가 조사를, 박영숙 전 평민단 위원(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의 추모사를 낭독했다. 박 이사장은 추모사를 읽는 내내 눈시울을 붉혀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이 여사 역시 한순간도 고개를 들지 못하며 박 대표의 추도사가 마쳐진 순간에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몸이 불편한 가운데도 영결식에 참석한 김 전 대통령의 장남 홍일씨와 그의 동생들인 홍업, 홍걸씨 역시 슬픈 표정으로 일관했다. 한 총리는 조사를 통해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반목해온 해묵은 앙금을 모두 털어내는 것이 우리 국민 모두의 참뜻"이라며 "이제야말로 지역과 계층, 이념과 세대의 차이를 떠나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새로운 통합의 시대를 열어가야 하겠다"고 말했다. 박 이사장은 "이 땅의 민주주의는 당신의 피와 눈물 속에 피어났습니다"면서 "당신께서는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고 고인을 회상했다.추모사가 끝난 후 이어 천주교, 불교, 개신교, 원불교 순으로 종교의식이 진행됐다. 마지막으로 추모공연이 진행된 후 3군 의장대의 조총 발사로 영결식을 마쳤다.파키슨병을 앓고 있는 홍일씨는 무더위로 몸이 많이 불편해지자 잠깐 나무그늘로 옮겨져 휴식을 취한후 헌화를 무사히 마쳤다. 그는 안장식이 끝나는 순간까지 고인의 곁을 지켜 보는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같은 시간 서울광장에서는 5만여명이 넘는 시민들이 추모문화제를 가졌다. 참석자들은 대형 화면으로 생방송되는 영결식장 모습을 보면서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쳤다. 오후 3시12분께 영결식이 끝나면서 고인을 모신 운구차가 국회를 출발해 동교동 사저를 향했다. 운구행렬이 오후 3시47분께 동교동 사저에 도착한후 10여분간 머무르며 고인에게 생전 살았던 집을 마지막으로 보여줬다. 이어 김대중도서관 곳곳을 둘러보며 김 전 대통령과 작별인사를 했다. 손자 김종대 씨가 영정을 들고 사저로 들어가 고인이 주로 시간을 보냈던 1층 응접실과 2층 서재, 투석치료실을 차례로 들렀다. 이희호 여사는 5층 집무실에는 들르지 않고 거실에 주로 머물다가 사저를 떠났다. 광화문 네거리를 거친 운구행렬이 오후 4시17분께 서울광장으로 들어오자 10만명 가까이로 늘어난 시민들의 얼굴은 더욱 슬픔에 잠겼다.이희호 여사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짧은 인사를 나눈 후 추모제를 위해 마련했던 단상 앞에 섰다. 이 여사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대단히 감사하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와 국장 기간 동안에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주신 데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어 "제가 바라옵기는 남편이 평생 추구해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의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한다"며 "그것이 남편의 의지다"라고 강조했다. 이 여사가 다시 차량에 몸을 싣자 운구행렬은 서울역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가를 메운 시민들은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고,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서울역을 거쳐 국립서울현충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께. 이 여사를 비롯한 홍업, 홍걸씨 등 유족들이 차에서 내리고, 장의위원과 참관객들도 뒤를 따랐다. 김 전 대통령의 '영원한 비서실장' 박지원 의원도 맨 뒤쪽에 자리했다.4분 정도가 지나자 영구차 앞으로 의장대가 정렬했다. 이내 의장대는 김 전 대통령의 유해의 운구를 시작, 태극기로 곱게 쌓인 김 전대통령을 모신 관은 그렇게 서서히 재단으로 이동했다.운구가 시작되자, 이 여사는 못내 참았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부축으로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떼는 순간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잠시후 국가유공자 제1묘역 하단부, 이 여사의 눈물을 뒤로한 채 운구행렬은 미리 준비된 묘역에 도착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묘소와는 100여m,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와는 350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김 전 대통령의 영정이 재단에 놓여졌고, 유족과 장의위원들은 자리에 앉아 개식을 준비했다.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유족들의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유족과 친지, 평소 김 전 대통령의 옆을 지켜왔던 측근들의 헌화와 분향이 이어진후 하관식이 진행됐다. 하관식에는 유가족 18명과, 전직비서 10여명이 참석했다.하관식을 마친 후 흙을 삽으로 뿌리는 허토 의식이 거행됐다. 허토에는 고 김 전 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 생가에서 가져온 '흙 한줌'이 뿌려졌다. 곧바로 묘역에 '지석'을 넣은 후 흙을 덮기 시작했다. 지석에는 대통령 성함과 호, 성장과정을 비롯해 일본납치사건과 대통령 취임, 정상회담 등 그동안의 정치역정 등이 쓰여졌다. 또 퇴임 뒤 활동과 저서, 이희호 여사와의 결혼, 가족들의 이름 등 가족사도 모두 기록됐다.의장대의 조총의식을 마지막으로 김 전 대통령의 안장식은 마무리됐다. 식이 마쳐진 뒤에도 이 여사는 고개를 들어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차마 보지 못했다.남편의 장례를 모두 마친 이 여사는 "남편이 평생 추구해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의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말했다.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상징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6일간의 국장(國裝)은 이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이날 자정까지 조문을 받는 서울광장 분향소에는 밤 늦은 시간까지 애도와 추모의 발길이 이어졌다. 김 전 대통령의 아름다운 삶을 우리 가슴속에 묻는 날이었다. 조영주 기자 yjcho@asiae.co.kr김수희 기자 suheelove@asiae.co.kr조해수 기자 chs900@asiae.co.kr황준호 기자 rephwang@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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