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난 극복 위해 개발된 품종 '고시히카리'…일본 전역 재배
매년 랭킹 발표할 정도로 쌀에 진심
쌀 부족 소동 원인으로 '시스템 붕괴' 지목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한 일본 관광객들의 '쇼핑 목록'에는 쌀이 있다고 하죠. 일본의 쌀값은 현재 14주 연속 오름세를 기록한 상황으로, 정부가 비축미를 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쌀값이 잡힐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일본 관광객이 사가는 쌀이 고시히카리인데요.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재배하는 익숙한 품종이죠. 이 고시히카리는 도대체 무슨 품종일까요? 오늘은 고시히카리를 비롯한 일본의 쌀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식량부족 대응하기 위해 탄생한 고시히카리
고시히카리는 일본에서 홋카이도와 아오모리를 제외한 전국 45개 도도부현(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 격)에서 재배되고 있습니다. 재배 면적이나 생산량 모두 일본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품종인데요. 일본 전역에 있는 논 중 3분의 1이 고시히카리를 키우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합니다.
이 고시히카리의 탄생 비화를 알기 위해선 일본이 2차대전을 일으키기 전의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현재 일본에서 쌀 명산지로 불리는 니가타현 등 호쿠리쿠 지방은, 당시 전체 논의 60% 이상이 물이 잘 빠지지 않는 습전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벼농사도 잘 되지 않아 불리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습전지대에 적합하게 빨리 자라고 생산량이 많은 품종 '농림 1호'가 탄생합니다. 농가에서 너도나도 이 품종을 심기 시작하죠. 그러나 어느 정도 인기를 끈 뒤에는 이 품종이 도열병에 약하고 쉽게 쓰러진다는 결함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고, 나중에는 점차 심는 곳이 줄어들고 있었다고 해요.
이후 2차세계대전과 패망 이후 복구 시기 일본은 다시 한번 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합니다.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빨리 자라고 양을 많이 거둘 수 있는 품종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해졌죠. 니가타현에서는 앞서 등장한 농림 1호를 개량하는 데 집중하는데요, 당시 가장 도열병 등 병충해에 강력했던 '농림22호'를 보고 두 품종을 교배시키기로 합니다.
그리고 후쿠이현 농사 시험장에서 이를 재배하고 육종 작업을 거치는데요. 이렇게 1956년 고시히카리라는 품종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후 종자 개량을 거듭해 지금의 고시히카리로 자리 잡게 된 것이죠.
니가타현에서 만들어 후쿠이현에서 심는 데 성공한 품종. 이름을 어떻게 붙일까 고민하다가 두 지역의 공통점을 생각해냅니다. 지금의 니가타현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예전에 '에치고'국이 있었고, 후쿠이현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에치젠'국이 있었습니다. 둘다 공통으로 '에치'로 발음되는 한자(越)는 일본어로 '코시'로 발음됩니다. 둘 다 '코시'가 들어가는 나라인데요. 그래서 이 두 코시의 나라에서 빛나는 쌀로 자랐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코시 뒤에 '히카리'로 발음되는 '빛 광(光)'자를 붙여 고시히카리로 짓게 됩니다. 이후 장려품종이 되면서 일본 전역에서 자라게 되는 거죠.
쌀 랭킹도 발표…쌀에 진심인 일본
고시히카리부터 시작해서 일본도 꽤 쌀에 진심입니다. 우리나라도 '수향미는 밥 짓는 냄새만 맡아도 맛있다'며 추천하곤 하잖아요? 정식을 파는 식당에서는 본인들이 어떤 쌀을 사용하는지 표시해놓기도 하고, 반찬과 잘 어울리는 쌀을 따로 선별해놓기도 합니다. 일본곡물검정협회에서는 매년 쌀 랭킹도 발표하는데요. 매년 전국의 쌀을 산지와 품종별로 평가해 발표하는 것으로, 전문 평가원 100명이 블라인드 테스트로 시식해 맛, 향기, 찰기, 단단함, 외관, 종합평가 등 6개 항목을 심사합니다.
특A·A·A'·B·B' 5단계로 분류하는데 특A를 받으면 고품질 쌀이 되는 것이죠. 쌀 명산지의 경우 특A에서 A로 떨어지거나, A가 특A로 올라가는 경우 기쁨과 실망을 반복할 정도로 권위 있는 쌀 랭킹입니다. 심지어 이 평가를 도매 기준으로 삼는 마켓이나 외식업체도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자존심을 건 쌀 대결이라고 볼 수 있죠. 지난 2월에 발표된 2024년 랭킹에 따르면 특A는 39품종으로, 11년 만에 가장 그 숫자가 적었다고 해요.
쌀 품질에 영향을 미친 건 기상이라고 하는데요. 특히 늦더위가 심했던 규슈지역에서 품질 저하가 두드러졌다고 하죠. 규슈지방 구마모토현의 지역 브랜드 '모리노 쿠마상'은 작년 특A를 받았지만, 올해 늦더위로 A로 한 단계 내려갔다고 하는데요. 구마모토현에서는 특A 쌀이 되기 위한 프로젝트팀을 2023년부터 시작해서 농협과 지자체에서 직접 비료를 뿌리는 타이밍, 물관리 등을 농가에 지도할 정도로 열심인 곳입니다. 하지만 늦더위를 피해 갈 수 없었다고 해요. 대신 북쪽으로 기온이 상대적으로 낮은 홋카이도나 도호쿠, 호쿠리쿠는 농사가 잘됐다고 하네요.
관서지방은 8월 말부터 이어진 극심한 더위 때문에 쌀에 백탁현상이 나타나는 등 영향이 생겨 품질이 저하됐다고 해요. 그래서 요즘은 고온에 내성에 강한 품종이 특A를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고시히카리 명산지 니가타현에서도 7개 품종이 출품됐는데, 우오누마의 고시히카리만 특A를 받았다고 합니다. 비가 많이 와서 벼가 많이 쓰러져서 맛이 떨어졌다고 하네요.
날씨도 날씨인데다 쌀값은 계속 오르고 있는데요. 지난 18일 총무성이 발표한 일본 3월 소비자물가지수에 따르면 쌀값이 전년 동월 대비 92.1%나 올랐다고 합니다.
쌀 부족은 정말 관광객 때문일까
그렇다면 왜 갑자기 이런 쌀 소동이 벌어지게 된 걸까요? 일본에서도 방일 관광객이 많이 와서, 이상기온으로 흉작이라서, 대지진 공포로 사람들이 사재기해서 등의 이유를 가장 먼저 들죠. 그러나 이 이유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방일 관광객들이 2박 3일, 3박 4일 있으면서 쌀을 1t씩 먹어 치우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렇게 따지면 우리나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비빔밥과 김밥 사 먹는데, 우리나라도 쌀 부족 우려가 생겨야 하거든요.
전문가들은 그간 일본이 고수해 온 쌀과 관련한 정책 부작용이 터져 나온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1971년부터 '감반정책'을 시행해왔습니다. 고시히카리를 개발할 당시에는 일본도 식량난을 겪고 있었지만, 이후 경제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쌀이 남아돌기 시작한거죠. 식생활도 서구화되면서 빵이나 면으로 대체하는 경우도 많아졌고요.
그래서 일본 정부가 '만드는 쌀의 양을 줄여주면 보조금을 지불하겠다'라는 정책을 취합니다. 보조금은 0.1ha당 연간 최대 10만5000엔 정도를 지급한다고 해요. 소비가 줄어드는 속도에 맞춰 생산량을 줄여서 쌀값이 폭락하는 것을 막고, 농가들도 보조금을 주니까 불만은 없게 된 거죠. 그러다 2018년 이렇게 가다간 일본 농업 경쟁력이 없다며 이 정책을 폐지했는데, 지금도 쌀 대신 밀이나 대두, 사료용 쌀로 바꿔서 재배하는 농가엔 보조금을 주는 방식을 이어가고 있어 명목상 폐지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정책에 대한 설명만 들으면 벼농사를 그만두고 보조금 받는 편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 시기 굉장히 많은 일본의 농부들이 시련을 겪었습니다. 쌀 생산량이 예상을 넘게 되면 농가에서는 독자적인 판로로 '자유미'로 내다 팔았는데, 이를 지자체나 경찰이 밀거래라며 유통을 금지하려고 검문하고 단속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벼농사에 들인 한 해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해 빚만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농부들도 많았다고 해요.
이런 통제 덕분에 결국 일본은 쌀 재배 면적과 생산량을 거의 절반 가까이 줄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까지 오는 과정에서 일본의 쌀 생산 구조가 무너져버렸다는 것이죠. 사실상 벼농사를 잘 지을 필요가 없게 됐으니 생산량을 올리기 위한 설비 투자를 할 만한 여유도 없고,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 다른 작물을 주력으로 하는 농가에서 조그맣게 먹고살 만큼만 재배하는 경우도 많고요. 이렇게 유통이 불가능하고 먹고 살 만큼만 농사짓는 영세농가가 많다 보니 재배면적 대비 유통되는 생산량이 많을 수가 없습니다. 농촌에서는 고령화가 빨리 진행되다 보니 이제 농사를 이어받을 영농 후계자도 없는 상황이죠.
이렇게 쌀 농가와 관련된 구조 자체가 붕괴해있으니, 이상고온으로 흉작이 발생하거나 조금이라도 쌀 소비량이 예상보다 늘어나거나 하는 등 작은 문제가 생기면 이번 쌀 소동처럼 시스템 자체가 연쇄 붕괴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아사히신문은 "일본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시작됐다"는 우려를 전하기까지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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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쌀이 없어?'라는 희한한 소동으로 넘기기엔 이 문제는 나라의 식량안보의 시스템 붕괴가 어떻게 국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나라에서도 남 일로 치부하기 어렵죠. 이번 일본의 쌀 소동을 통해 여러 방안의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전진영 기자 jintonic@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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