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현 건강보험제도)가 정착되면서 우리 국민은 누구나 부담 없이, 손쉽게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저수가에 기반한 박리다매식 진료로 의료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동시에 건강보험에서 보장하지 않는 비싼 '비급여' 항목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러자 '실손보험(실손의료보험)'이 등장해 더 많은 의료 소비를 부추겼다. 비급여 진료를 받아도 실손보험에서 보장이 되니 의료 소비자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보험사들이 앞다퉈 누구나 들어야 하는 필수 보험처럼 판매에 열을 올린 덕분에 우리나라 인구 5000만여 명 중 무려 4000만명이 가입했다. 실손보험이 '제2의 건강보험'으로 불리는 이유다.
문제는 설계 당시부터 실손보험이 건강보험과 합리적으로 역할 분담이 되지 않아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늘려왔다는 점이다. 도수치료나 체외충격파부터 비타민·영양 주사, 백내장 환자의 다초점렌즈 삽입술, 한방병원 피부미용 시술까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다양한 방법으로 실손보험을 이용해 과잉진료를 하는 병원과 실손보험을 남용하는 환자들의 사례가 이슈가 돼 왔다.
실손보험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건강보험 재정도 갉아먹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급여 진료와 실손보험이 보장하는 비급여 항목이 결합한 '혼합진료'가 증가하면서 건강보험 지출도 크게 늘었다. 실손보험 덕분에 피부과, 안과, 정형외과 등에서 고가의 경증 치료로 손쉽게 돈 벌 수 있는 구조가 굳어지면서 의사들이 돈 되는 진료과로만 쏠리고 필수과는 외면하는 현상도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병원은 실손보험 환자들을 겨냥한 새로운 의료서비스를 창출해 내고, 주기적으로 오르는 보험료에 본전 생각이 나는 보험 가입자들은 과잉의료에 편승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셈이다.
결국 정부가 과잉진료를 부추기고 필수의료를 무너뜨리는 실손보험에 대한 개혁에 나섰다. 올해 연말께 발표할 '의료개혁 2차 실행방안'에 불필요한 비급여 항목을 대폭 손질하고 환자의 본인 부담을 높여 실손보험 가입자의 도덕적 해이를 차단할 방안을 내놓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정보의 불균형이 발생하는 의료 시장에서 환자는 병원(의사)이 하자는 대로 비급여 진료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사실 실손보험 도입 초기부터 이런 상황을 통제할 시스템이 있어야 했다. 의료계의 반발이 적지 않겠지만, 정부가 비급여 목록과 가격을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다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실손보험 가입자 중 이미 질병으로 치료받고 있는 환자가 당초 약속된 보장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유병력자는 새로운 보험에 가입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대폭 오른 보험료를 감수하며 기존 1세대·2세대 실손보험을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보험사가 은근슬쩍 책임지지 못할 '환승계약'을 유도하는 건 옳지 않다. 경미한 질병일지라도 치료가 꼭 필요한 환자, 의사의 판단에 의해 합당한 치료 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보험사가 의료자문 결과 등을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는 상황도 투명하고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공적보험이 아닌 사보험인데, 이제 와 보험사들의 손실을 메꾸고자 그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하거나 불필요한 세금이 낭비돼서도 안 될 일이다.
조인경 바이오중기벤처부 차장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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