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거티브 넘어 상대 후보에 원색적 비난
해리스엔 역효과 날 수 있단 지적도
상대 후보의 실수나 약점을 끄집어내는 네거티브 전략은 선거에 열기를 더하는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그러나 미국 대선은 한술 더 뜬다. 네거티브를 넘어 근거 없는 원색적 비난과 '막말'을 쏟아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입은 여전히 지칠 줄 모른다. 비교적 자중하는 듯했던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조차 이에 질세라 발언의 수위를 높이면서 두 사람의 맞대결이 진흙탕 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막말이 지닌 대표적 특징은 분열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지난 3월 오하이오주 유세에서 "내가 선거에서 지면 국가가 '피바다(blood bath)'가 될 것"이라거나 "이민자는 사람이 아니다" 등의 위험 발언을 내뱉었다. 유권자들을 정치 성향과 인종에 따라 구분 짓고 혐오를 조장한 것이다. 지난 7월에는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이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후보직 사퇴를 설득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펠로시가 바이든에게 개처럼 대들었다"며 민주당 내 잡음을 이간질의 기회로 삼기도 했다.
교묘한 이간질은 해리스 부통령이 바통을 넘겨받은 뒤에도 계속됐다. 그는 지난 7월 전미흑인언론인협회(NABJ) 초청 토론에서 해리스 부통령에 대해 "그녀는 항상 인도계였고, 인도계 유산만을 홍보했다"며 "나는 몇 년 전 갑자기 그녀가 흑인으로 변신하기 전까지 그녀가 흑인인 줄 몰랐다"고 조롱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집토끼'인 흑인 및 라틴계 표심 이탈이 확인되자 지지층 분열에 박차를 가한 셈이다. 이후 해리스 부통령과의 TV 토론에선 "오하이오주의 아이티 이민자들이 주민들의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는다"고 발언해 지역이 발칵 뒤집혔고, 지난달 애리조나주 유세도 "미국은 세계의 쓰레기통 같다. 전 세계 교도소, 감옥, 정신병원에서 범죄 이민자들이 오고 있다"며 거친 입담을 이어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인종주의적 발언에 당황한 공화당이 만류에 나섰지만, 이른바 '무근본' 막말은 계속됐다. 그는 지난 8월 핵심 경합주로 꼽히는 펜실베이니아 유세에서 해리스 부통령을 "미치광이"라고 공격하는가 하면 9월에는 "해리스는 정신장애를 갖고 태어났다"고 힐난하기도 했다. 지난달엔 급기야 해리스 부통령에 "빌어먹을 부통령"(shit vice president)이라고 욕설까지 내뱉는 지경에 이르렀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입이 계속 거칠어지고는 있지만, 지지율에 악영향을 끼칠지는 미지수란 평가다. 공화당 전략가 데니스 그레이스 기샴은 "유권자들은 트럼프의 이러한 수사(rhetoric)를 2016년부터 들어왔기 때문에 막말 논란이 또 터져도 표심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며 "트럼프의 인성이 마음에 안 들어 돌아설 사람은 이미 돌아섰다"고 분석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막말 일변도에 비교적 점잖게 대응하던 해리스 부통령조차 최근 들어선 발언의 수위를 높이는 모습이다. 해리스 부통령은 지난달 워싱턴 D.C. 관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트럼프는) 파시스트에 해당한다"고 말해 언론들의 조명을 받았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에서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존 켈리가 과거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미국 헌법에 충성하는 군대가 아닌 히틀러가 가졌던 장군을 원한다"고 폭로한 것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 셈이다.
막말 네거티브에 있어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일당백 수준의 기량을 보이는 반면, 해리스 부통령은 주변 인물들의 지원사격을 받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과거 트럼프 전 대통령의 막말에 맥을 못 추다 대선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봤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부 장관이 해리스 부통령의 '파시스트' 발언을 두둔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8월에는 해리스 부통령의 러닝메이트인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가 트럼프 전 대통령과 자신의 맞상대인 J.D. 밴스 연방상원의원을 겨냥해 "그들은 기괴하다(They're weird)"고 비난하며 저격수 역할을 자처하는 모습을 보였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또한 "더 늙고 더 미친 트럼프를 보기 싫다"며 공세에 가담했고, 바이든 대통령의 경우 최근 "트럼프 지지자는 쓰레기"라고 발언해 백악관이 해명에 나서기도 했다.
다만 이 같은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이전투구가 해리스 부통령에게 유리하게 작용할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대부분 유권자의 트럼프에 대한 견해는 이미 오래전에 굳어졌지만 해리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며 "해리스의 네거티브는 오히려 부동층 유권자를 멀어지게 하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BBC는 "지지율이 초박빙 양상으로 흘러가면서 다급해진 민주당이 트럼프 리스크를 부각하는 쪽으로 선회한 것 같다"며 "지지층을 규합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트럼프와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그녀가 선거 초반 약속했던 통합의 메시지가 퇴색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김진영 기자 camp@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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