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일자리 동행' 배달업무 현장
첫 도보배달 나선 오인식 어르신
은퇴 후 10년간 다양한 업무 도전
"나이 여든이 넘고 보니 내 쓰임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들더군요. 우연히 도보배달 이야기를 듣게 됐는데, 도전해보자는 마음으로 신청하게 됐습니다."
지난달 중순 서울 구로구 신도림역 인근에서 만난 오인식씨(80)는 셔츠에 정장 재킷 차림을 한 정중한 노신사의 모습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오른쪽 어깨에 커다란 배달용 보랭백을 메고 있다는 것. '우리동네 딜리버리'라는 문구가 새겨진 검은 보랭백을 보여준 오씨는 기자를 만나자 반갑게 인사를 청했다.
오씨는 이날 첫 도보배달에 나섰다. 서울시와 GS리테일이 함께 운영하는 '어르신 일자리 동행' 사업에 참여했다. 어르신 일자리 동행은 만 60세 이상 어르신들이 GS리테일이 운영하는 도보배달 중계 서비스인 '우리동네 딜리버리'에서 배달원으로 일하는 사업이다.
오씨는 지난달 9일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에서 진행된 우리동네 도보배달 4차 직무교육에 참가해 6시간에 걸쳐 안전교육과 배달 진행 과정, 배달원용 애플리케이션(앱) 사용법 등을 교육받았다. 오씨는 당시 교육을 받기 위해 참석한 어르신 중 최연장자였다.
오씨는 우리나라 1세대 산업디자이너로 꼽힌다.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60학번'이다. 당시는 우리나라에 산업디자인이라는 개념조차 흔치 않았을 때였다. 대학 졸업 이후 산업디자인 사무소를 직접 차린 뒤 은퇴할 때까지 현업에 종사하면서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과 자주 협업할 정도로 성업했다.
오씨의 별명은 '오슈타인'이다. 다양한 업무를 하다 보니 모르는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만큼 은퇴 이후에도 일을 멈추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이어왔다. 실제 다양한 일을 했다. 직업훈련교사 자격증을 취득해 본인처럼 은퇴를 앞두고 제2의 삶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전직 교육을 진행했고, 공업 사무소를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지금도 산업디자인 관련 박람회가 열리면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최신 트렌드를 익힐 정도로 본업이던 산업디자인에 대한 관심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갓생(갓(God)+생(生)·모범적이고 부지런한 삶)'의 삶을 은퇴한 지 10년이 넘은 오씨가 살고 있는 셈이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병나…운동도 되고 얼마나 좋아"
오씨가 이번 도보배달 사업에 참여한 이유도 도전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집에서 있다보면 병이 나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는 "여러 고민을 하다가 도보배달 정보를 얻어서 들어가 봤는데, 목적을 가지고 운동을 하는 동시에 소소하게 용돈벌이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바로 신청하게 됐다"면서 "어르신들이 밖에 나와 움직여야 한다. 주변 또래들에게도 공원에라도 나오라고 하는데, 그래야 집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건강하다"고 자부했다.
오씨는 이날 첫 배달을 위한 채비를 단단히 했다.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에서 진행됐던 예비 교육에 참가해 교육을 이수한 뒤, 도보배달 과정과 배달원용 앱 사용법을 안내한 책자에서 내용을 발췌해 학습용 노트까지 만들었다. 배달에 필요한 정보들을 종이 한 장에 정리해 들고 다니기 용이하도록 했다.
첫 배달은 기자를 만난 지 한 시간가량 지난 오후 2시30분께 주문이 들어왔다. 신도림역 인근에 있는 올리브영이었다. 앱 화면에는 배달 장소까지의 거리와 배달 물품의 무게, 물품의 종류 등이 표시됐다. 배달비는 2000원이었다. 오씨가 도보배달 수락 버튼을 누르자 물품 픽업까지 남은 시간이 표시됐다.
올리브영 매장에 들어서자 입구 한쪽에 배달 물품 픽업용 진열대가 마련됐다. 배달원용 앱에 표시된 물품 번호를 확인한 오씨가 포장된 상품을 집어들었다. 이후 픽업완료 버튼을 누르자 배달 장소의 주소와 주문자의 요청사항, 배달까지 남은 시간이 표시됐다. 배달 장소까지 길을 모르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우딜 앱과 지도 앱이 연동돼 현재 위치에서 배달 장소까지의 이동 경로를 안내해주기 때문이다.
물품을 픽업한 매장에서 배달지까지의 거리는 약 2㎞. 도보로만 이동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거리인 만큼 지하철로 한 정거장을 이동하기로 했다. 만 65세 이상인 오씨는 지하철 무임승차가 가능한 만큼 비용 부담은 없었다. 배달물품을 제대로 집었는지 재차 확인한 오씨는 배달용 보랭백에 물품을 담고 곧장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배달지까지의 이동은 지도 앱에 나온 경로를 따라 움직였다.
지하철로 이동했지만 도보로 움직여야 할 거리는 적지 않았다. 하루 평균 1만보 이상 걷는 기자도 다리가 아플 정도였다. 오씨는 "끄떡없다"고 했다. 앱에 표시된 공동현관 출입용 번호를 입력한 뒤 배달 장소의 문 앞까지 도착했다. 주문자의 비대면 배달 요청에 따라 문 앞에 물품을 두고 배달완료 사진을 촬영해 앱에 업로드하면서 배달은 마무리됐다. 길을 찾는 과정에서 약간의 혼선을 겪었지만, 철저한 연습 덕분이었는지 큰 어려움은 없었다. 오씨는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구나"라며 "자신감을 얻게 됐다"고 활짝 웃었다.
그는 "사실 도보배달로 버는 소득을 생각하면 소일거리 정도지만, 배달을 위해 걸어다니면서 운동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다른 사람한테 권장하고 싶다. 직접 해본 만큼 경험을 바탕으로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강조했다.
이명환 기자 lifehw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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