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1일은 57회 과학의 날이다. 매년 이맘때만 되면 전국은 ‘과학 축제’ 열기가 넘쳐난다. 서울, 대전 등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과학 행사는 청소년들이 과학을 접할 기회다. 과천 국립과학관은 무료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한국 과학기술의 본산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홍릉 본원 잔디마당에서 페스티벌이 열리곤 했다. 역대 대통령들은 과학의날 행사에 참석해 과학인들을 격려했다.
올해 과학의 날 분위기는 다르다. 한국의 과학기술이 어느 때보다도 전 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지난해 불거진 초유의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후폭풍이 과학계에 드리운 먹구름이 여전히 가득하다. 정부와 국민들은 의대 정원 확대로 인한 전공의 파업 수습에만 관심이 쏠려있다. 과학의 자리는 없어 보인다.
과학자들의 자존심도 무너졌다. 결정타는 과학계에 카르텔이 만연하다는 정부의 판단이었다. 국가발전에 기여해왔다고 자부하던 과학자들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다. 지난 2월 임명된 이창윤 과기정통부 1차관은 ‘예산삭감보다 카르텔이라는 시선이 더 마음이 아팠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도전정신으로 가득해야 할 과학자들의 마음에는 병이 들었다.
정부는 올해 R&D 예산 대폭 증액을 연이어 강조하고 있지만, 카르텔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카르텔이 정말 있었는지에 대한 실체 규명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어느새 ‘카르텔’은 과학 당국의 금기어가 됐다. 정말 카르텔이 있었는지 궁금하지만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다.
예산은 다시 복원하거나 삭감 이전보다 늘릴 수도 있다. 학생 연구자에 대한 지원을 강화한다고 하지만 그 정도로는 땅에 떨어진 과학자들의 사기를 되살릴 수 있을까. 과학자들의 사기 살리기는 과학의 날이 왜 생겼는지에 대한 복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1967년 과학기술처(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과학기술처 발족일을 기념하고 범국민 과학화 운동을 위해 과학의 날을 제정하자는 과학계 건의를 받고 실행에 나섰다. ‘과학의 생활화’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평소 지론이기도 했다. 그렇게 1968년 제1회 과학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박 전 대통령은 과학기술후원회(현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설립자도 자임했다. 박 전 대통령이 작성한 과학기술후원회 취지문에는 과학기술 진흥을 위해 과학자와 기술자를 우대하고 생활 구석구석까지 과학기술이 스며드는 사회풍토를 조성하는 게 시급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현 KIST) 설립을 챙기며 개인 자격으로 사비 100만원을 설립비로 기부했다. 과학창의재단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정부가 연구소 예산을 삭감하자 경제기획원에 전액 복원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후 연구소가 요청한 예산에 대한 칼질은 없었다. 과학계가 기억하는 원조 ‘과학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임이 분명하다.
윤석열 대통령도 과학 대통령을 자임하며 세계 최고, 최초에 도전하는 과학을 추구한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보다 실패에 대한 용인이 더욱 필요하다. 정치는 실패해서는 안 되지만 과학은 실패를 자양분 삼아 발전한다. 조성호 카이스트(KAIST) 실패연구소장은 연구소 소개 글에서 실패한 시도를 좀 더 관대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 있는 메시지를 우리 사회에 전해야 한다고 했다.
효율과 실패는 분명 구분돼야 한다. 그래야 움츠러든 과학자들의 어깨도 다시 펴지지 않을까. 시간이 얼마 없다. 내년 과학의 날에는 도전적 연구에 나서는 과학인들의 패기를 다시 보고 싶다.
백종민 기자 cinqang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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