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 감독 인터뷰
‘인연·윤회·성장’ 보편적 공감 이끌어
애틋한 사랑…섬세한 감정의 편린 포착
데뷔작으로 오스카 입성한 신인 감독
“친구 사이지만 깊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한다면 그건 사랑이다.”
셀린 송 감독(36)이 사랑을 바라보는 미스터리한 시선은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세상에는 단어로 특정되지 않는 관계가 있다.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친구.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고, 연인이라기엔 손도 한번 안 잡은 남녀. 감독은 이들 관계를 ‘인연’으로 설명한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송 감독은 “미국에서는 ‘인연’이란 단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의미를 영화로 설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로맨스 NO, 미스터리 YES…삼각관계 아닌 ‘인연’
‘패스트 라이브즈’는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첫사랑 나영(그레타 리)과 해성(유태오)이 24년 만에 뉴욕에서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한국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이주해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한 송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영화에 배어 있다. 하지만 “이민자만의 이야기는 아니다”라고 했다.
인연, 윤회 등 동양적 사상이 바탕 됐지만, ‘사랑’과 ‘관계’, ‘성장’이라는 보편적 코드에 집중했다. 송 감독은 “한국에서 태어나 12년을 살았다. 한국 영화나 예능프로그램도 즐겨 본다. 한국에서 매일 사용하고 부딪히는 단어이기에 ‘인연’의 뜻을 잘 안다”고 했다.
한 여자를 둘러싼 두 남자. 로맨스 영화에서 흔히 ‘삼각관계’로 포장하지만, 송 감독은 달랐다. 그는 “나영과 해성, 나영의 남편 아서(존 마가로)는 어떤 관계일까, 세 사람은 ‘인연’이다. 관객은 그들 관계에 놓인 탐정이 되고, 미스터리가 마지막에 풀리도록 설계했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송 감독이 추구하는 남성상이 녹아있다고 했다.
“추구하고 사랑하는 남성의 모습은 ‘내 여자 건들지 마!’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소중한 사람을 위해 하룻밤만이라도 내 질투나 필요, 결핍을 접어두는 것. 상대를 1번으로 생각해주는 것이죠. 자신을 일정 부문 희생하는 모습이기도 해요. 아서와 해성도 그래요. 두 사람이 서로를 받아들여서 자리를 내어주고 공존하며 나영이를 더 이해하고 사랑해요. 이를 통해 나영도 완전해지죠.”
영화는 배우 유태오의 순수하고 해맑은 장점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어린아이와 어른이 공존하는 얼굴을 발견한 송 감독이었다.
“유태오가 ‘안녕하세요’라며 웃는데, 어린아이 같았어요. 다른 시공간 속에 어른과 아이의 얼굴이 교차해야 했는데, 잘 맞았죠. 해성은 안 맞는 옷을 입은 어린아이 같아요. 그래서 바지는 작게, 셔츠는 크게 입혀서 그런 모습을 표현하려 했죠.”
영화를 보고 혹자는 내 X(전 연인)와 이번 생엔 인연이 아님을 받아들였고, 또 누군가는 마음에 품은 사람을 보기 위해 비행기 티켓을 샀다고 했다. 송 감독은 “인생 어디에 서 있든지, 어떤 사랑을 하든지. 상황이나 마음에 따라 영화가 다르게 다가온다. 온전히 ‘관객의 것’이 되는 영화”라고 바라봤다. 나영과 해성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송 감독은 “엔딩크레딧(영화 끝나고 올라가는 자막)에 답이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이 스카이프를 나누는 장면과 엔딩크레딧 장면에 삽입된 음악이 힌트다. 이는 영화의 여운을 짙게 만드는 핵심 코드다.
“생애 첫 오스카 레이스 신나! 값진 영화 수업”
송 감독은 영화 ‘넘버3’(1997)를 연출한 송능한 감독 딸이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영화적 조언을 받지는 않지만, 내 인생이 부모님과 연결돼 있다. 당연히 아버지의 어떤 걸 업고 왔다고 생각한다. 인생 자체가 조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있는 시간이 그래서 더 소중하다”고 했다.
송 감독은 데뷔작으로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상) 후보에 지명되는 쾌거를 이뤘다. 작품상·각본상 후보에 올라 거장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오펜하이머)과 겨루게 됐다. ‘패스트 라이브즈’를 본 놀란 감독은 “미묘하고 아름다운 영화”라고 극찬했다. 송 감독은 “데뷔작으로 오스카까지 갈 수 있어 신나고 영광”이라며 지난 1년 값진 수업을 통해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지금은 한국 관객이 내 영화를 어떻게 봐줄지 가장 궁금해요. 영화를 만들 때는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올인’하는 편이에요. 신나고 재밌게 일하죠. 그 정도로 제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면, 다음 영화를 시작해야죠.”
이이슬 기자 ssmoly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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