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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금융사]대공황을 극복한 '뉴딜' 또 다른 자본주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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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한가운데에 선 루스벨트
의회 개혁법안 통과시킬때까지
모든 은행 폐쇄로 임기 시작
노변담화로 국민에게 직접 연설
당시 극도의 자유방임주의 통제
정부가 복지·주택·물가 등 결정

[세계금융사]대공황을 극복한 '뉴딜' 또 다른 자본주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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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미국 경제는 멈추지 않는 번영의 새 시대에 들어선 것 같았다. 그런 희망 어린 생각은 호황이 아니라 파국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냥 뉴욕증시의 해프닝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증시폭락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미국 증시가 벼랑 끝을 걷고 있던 그 순간,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등장한다. 그는 강의를 위해 미국을 방문했고, 강연료와 원고료 2달러를 주식에 투자하기도 했다. 1929년 10월24일 목요일 월스트리트를 걷고 있던 처칠은 뉴욕 증권거래소를 방문했다. 그는 후에 검은 목요일이라 불린 뉴욕증시의 대폭락을 목도한다.


개장 30분 만에 지수가 10% 폭락했고, 상당수의 종목에 매수 주문이 없었다. 처칠은 그날을 "마치 개미집을 들쑤셔 놓은 것처럼 증권거래소에 있는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들은 엄청난 양의 주식을 헐값에 팔아 치우려 했지만 그 엄청난 물량을 사려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기억했다.


허버트 후버 행정부는 증시 공황의 여파를 차단하기 위한 조처를 취했다. 후버 대통령은 수요를 유지하기 위해 기업인들에게 임금을 삭감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건물 신축 등의 건설 계획을 발표하도록 했다. 연이어 소폭의 세금감면도 발표했다.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는 재할인율을 낮췄다. 뉴욕 연방준비은행도 콜시장의 자금 이탈을 관리하기 위해 조처했다. 다행히 은행과 기업의 업무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다우지수가 반등하자 다시 낙관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뉴욕에 100층이 넘는 고층 빌딩이 경쟁하듯 건설되던 시기였다. 1930년 3월 후버 대통령은 2개월이 지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 말했다.


그렇지만 다우지수는 끝내 추락하고 만다. 그 사이에 미국 국내총생산(GDP)은 1929년 수준에서 60%나 줄었다. 실업자 수는 1250만명까지 늘어났다. 농업 인구를 뺀 나머지 인구의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다. 미국경제는 디플레이션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932년에는 유럽 성냥 시장을 독점해 ‘성냥왕’이라 불리던 스웨덴 출신의 금융사기꾼 이바르 크루거가 프랑스의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공황의 한가운데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그가 취임했을 때 미국은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1300만명인 절망적인 상태였다.


라디오로 방송된 첫 번째 취임사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위대한 국가는 지금까지 견뎌온 것처럼 견디고, 부활하고, 번영할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라고 대담하게 연설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가 개혁 법안을 통과시킬 때까지 며칠 동안, 모든 은행을 폐쇄하는 것으로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다.


은행 위기에 관한 첫 번째 ‘노변담화’는 약 6000만명의 라디오 청취자에게 방송됐다. 그는 은행도산 가능성을 우려하는 패닉에 빠진 투자자들과 은행예금의 대량 인출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국내 은행들을 폐쇄하기로 한 결정을 설명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다음 날 은행이 다시 문을 열 것이라 말했다. 그는 ‘은행 휴무일’ 동안 일반 대중이 보여준 인내에 고마움을 표했다. 이로써 그는 대중의 신뢰를 얻었다.


긴급은행구제법 통과 이후 은행 4곳 중 3곳이 일주일 만에 문을 열 수 있었다. 그 뒤로도 루스벨트 대통령은 정기적으로 전국 라디오를 통해 미국 국민에게 직접 연설했다. 어찌 보면 루스벨트 대통령의 진정한 업무는 정책 수립 자체라기보다는 정책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노동력의 25~33%가 실업 상태인 대공황의 최저점에 있었다.


국가는 위태로웠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의 연설은 위안이 되었다. 그는 두려움을 함께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를 제시했다. 대중은 점차 그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 3월부터 1944년 6월까지 이러한 방송을 30회 더 했다. 그 방송을 듣기 위해, 이제 90퍼센트의 국민이 라디오를 소유하게 된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은 ‘노변담화’라 불렸다. 대통령이 거실의 불 옆에 앉아 미국 국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그의 희망과 꿈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이미지를 불러일으켰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교육 수준에 관계없이, 일반 미국인이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간단한 어휘를 사용했고 서민적인 일화나 유추에 의존하여 국가가 직면한 복잡한 문제를 설명했다. 그의 노변담화로 미국민은 위로받았다. 대공황을 견뎌내고,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1935년 경제가 회복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 ‘제2의 뉴딜’로 알려진 새로운 개혁법안을 요청했다. 처음으로 미국인들에게 실업, 장애, 노령 연금을 제공하는 사회보장법이 포함됐다.


민주당이 주도하는 의회는 대기업과 부유한 개인에 대한 세금을 인상했다. 이는 ‘부자 흡수세’로 조롱받기도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은 1920년대 극도의 자유방임주의를 제어하는 것이었다. 시장을 대신해 이제 정부가 복지와 주택, 노동, 물가, 최저임금 등을 결정했다. 또 다른 자본주의의 시작이다.



백영란 역사저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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