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11일, 이끼 낀 고등학생 사체
마산 앞바다에 몰래 수장, 해안가로 밀려와
4·19 혁명 도화선, 보름 뒤 대통령 하야
1960년 4월11일. 경남 마산상고를 다니던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의 해안가로 밀려왔다. 현장을 오가던 군인들에 의해 발견됐다. 발견 당시 모습은 처참했다.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주검은 이끼가 낀 상태였다. 죽은 채로 바다를 한참 떠돌다가 돌아왔음을 의미했다. 행방불명 상태였던 김주열 학생이 주인공으로 드러났다. 전국은 충격에 빠졌다.
불안했던 정국에 격랑이 일었다. 민심의 거대한 분노가 마산을 넘어 부산, 서울, 대구, 광주 등 각지로 번졌다. 특히 마산의 상황은 심상치 않았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시위에 대한 엄단 의지를 밝혔지만, 민심의 분노만 자극했다.
김주열 학생의 충격적인 장면은 당시 언론을 통해 세계 각국으로 번졌다. 이제 한국의 사건이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는 사건이 돼 버렸다. 1960년 4월, 이승만 정부는 존폐의 기로에 섰다.
민심의 격랑은 1950년대 후반부터 감지됐다. 권력의 부패, 자유의 억압 등이 맞물리면서 민심은 떠나고 있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 정부를 회복 불능의 상황으로 이끌었다.
유령 투표, 기권 강요, 투표함 바꿔치기, 참관인 매수와 테러 등 할 수 있는 부정 선거의 방법은 다 동원했다.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이런 상황에서 충격적인 모습의 김주열 학생이 발견된 것이다.
4월11일 그날의 충격은 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인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승만 정부는 상황을 수습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4월19일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에 비상계엄령을 발동했다.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내린 특단의 조치다. 계엄령 선포에 따라 서울 시내에 장갑차가 배치됐다. 하지만 힘으로는 민심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다. 서울 시내에는 시위대가 물밀 듯이 이어졌다.
대학생, 고등학생, 회사원, 주부 등 다양한 사람이 거리로 나섰다. 정부는 경찰의 발포로 대응했다. 현대사의 비극, 많은 사람이 죽었다. 어린 학생도 여성도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숨을 거둔 이는 100명을 넘어 200명을 헤아리는 규모로 늘어났다. 부상자는 수천명에 달했다.
1980년 5월과 함께 1960년 4월의 그 사건은 현대사의 비극으로 남아 있다. 4·19 혁명은 60년도 더 지난 사건이지만, 그날의 충격과 아픔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김주열 학생의 주검이 발견된지 보름 후인 1960년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다. 시민들의 하야 요구는 마침내 실현됐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그는 정말로 민심을 수용한 것일까.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메시지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을 떠나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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