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끔찍한 가정폭력에 시달렸다. 딸 김모씨가 초등학생이던 2004년경,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행으로 수차례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아버지는 언니에게도 손찌검을 했다. 세 사람은 폭력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2007년 부모님은 이혼했고, 이후 김씨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김씨는 어엿한 대학생이 됐다. 그런데 2015년 3월 아버지가 김씨를 찾아왔다. 그는 “내가 운영할 업체 사업주 명의를 대여해달라”고 요구했다. 폭행을 당할까 봐 두려웠던 김씨는 아버지에게 명의를 빌려줬다.
4909만8160원. 국민연금공단이 서류상 사업주인 김씨에게 국민연금 보험료를 부과했다. 아버지가 이를 책임지지 않아 2015년 10월~2016년 10월 보험료가 미납된 것이었다.
김씨는 이에 불복해 국세청을 찾았고, 사실관계를 파악한 국세청은 김씨 요청에 따라 부가가치세를 취소했다.
김씨는 국세청 결정문을 국민연금공단에 제출했다. 그러면서 “(국민연금법상 사업주 신고 자체가 잘못된 것이므로) 당초 국민연금 사업자 설립신고를 한 2015년 9월16일로 소급해 사업주를 아버지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공단은 국세청 결정이 김씨에게 통지되기 하루 전인 2020년 2월14일로 사업주를 아버지로 바꿔줬다. 다만 그 이전으로 소급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통지했다.
김씨는 행정법원 문을 두드렸다. 김씨 측은 “공단의 소급 적용 거부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호소했다. 미납 보험료를 낼 필요가 없는 점을 확인(채무부존재확인)해달라고도 했다.
1심은 국세청 심사 과정에서 실제 사업주가 아버지인 점이 명백히 밝혀졌는데 공단이 자체 업무처리기준을 근거로 소급 변경을 거부한 것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우선 공단의 보험료 부과 처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봤다. 공단에 허위 신고 여부를 가릴 능력이나 권한이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면서도 “사업주 변경은 최초 신고일인 2015년 9월16일로 소급해 반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결했다. 사업장을 실제 운영한 사람이 아버지란 점과 가정폭력 영향으로 김씨 명의가 대여된 점 등을 인정한 것이다.
재판부는 “사업장 임금 체불 관련 진정 17건 가운데 13건의 상대방이 아버지로 돼 있고, 소재지가 강원 동해시로 사업장 신고가 이뤄질 당시 김씨는 서울 소재 대학에 재학 중이었다”며 “국민연금법상 사용자를 소급해 아버지로 변경해달라는 김씨의 신청을 정당한 이유 없이 거부한 것은 위법하다”고 설명했다.
양측이 항소하지 않으면서 1심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사업주 명의자가 바뀐 만큼, 미납된 보험료 납부는 김씨가 아닌 아버지 책임이 됐다. 한편 아버지는 2021년 4월 사망했다.
김대현 기자 kd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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