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근데 연진아, 내가 바둑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를 말해줄까?"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송혜교)이 박연진(임지연)에게 전하는 독백이다. 의문을 해소하려면 드라마 배경에 천착할 필요가 있다. 더 글로리를 견인하는 큰 줄기는 학교 폭력이다. 약자를 괴롭히는 악마의 손길. 학교는 정글보다 더 살벌하다. 돈과 힘이 질서를 만든다.
그곳에서 약자는 외롭다. 살갗이 타는 아픔,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영혼의 짓밟힘. 드라마에 담긴 학폭의 사례가 한국의 실화라는 게 더 충격이다. ‘K-학폭 복수극’에 세계가 반응했다. 넷플릭스 비영어권 드라마 가운데 세계 1위. 무엇이 인종과 국경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을까. 참혹함을 견뎌내는, 극복하는 동은을 응원하고자 하는 마음 아닐까.
죽을 만큼, 아니 죽음보다 더 힘겨웠던 학폭의 상흔. 동은은 자기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박연진에게서 찾았다. 그 복수극의 연결고리가 바둑이다. 반전과 역공 그리고 파괴의 시간이 바둑에 숨겨져 있다.
동은이 밝힌 바둑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바둑은 침묵 속에서 욕망을 드러내고 매혹하고 매혹당하며 서로를 발가벗겨…." 동은과 연진의 첫 번째 수담(手談)은 여운을 남긴다.
연진의 남편(정성일)은 돈 많은 사업가다. 그리고 바둑 애호가다. 동은은 기원(碁院)에서 연진 남편을 만났다. 두 번째 수담이다. 음침한 풍경의 기원에서 홀로 빛을 내던 매혹적인 여성. 그 여성의 얼굴에 드리운 음울한 기운. 연진 남편은 홀리듯 동은에게 끌렸다. 그리고 이성의 감정보다 더 아찔한 감성의 교감. 손끝 하나 닿은 적 없지만, 이미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두 사람이 그런 관계로 발전한 원인도 바둑이다. 동은은 원래 바둑을 둘 줄 몰랐다. 복수의 시나리오를 준비하고자 바둑을 배웠다. 대학 선배 주여정(이도현)과의 세 번째 수담. 은행잎이 휘날리던 공원(청주중앙공원) 벤치에 앉아 바둑을 뒀다. 스승인 여정은 바둑 원리를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바둑은) 끝에서부터 가운데로 자기 집을 잘 지으면서 남의 집을 부수면서 서서히 조여 들어와야 해요. 침묵 속에서 맹렬하게."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로 화답한 동은. "맘에 들어요." 동은의 예상 밖 대답에 여정의 눈빛은 잠시 흔들린다. 이처럼 더 글로리는 수담을 통해 작품의 흐름을 예고하고 암시한다. 바둑이 드라마 소재로 등장한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비정규직 세대의 애환을 상징하는 드라마 ‘미생’이 대표적이다. 미생은 드라마 제목 자체가 바둑 용어다. 미생도 드라마 전반에 잿빛 기운이 스며들어 있지만, 더 글로리와는 다르다. 미생의 종착역이 희망이라면 더 글로리는 파멸의 절정 너머, 어쩌면 더 참혹할지 모를 내일을 예고한다.
동은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행위는 고통을 수반한다. 시청자는 드라마에 몰입할수록 음울한 기운을 감내해야 하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더 글로리에 숨겨진 또 하나의 수담 대상은 시청자인지도 모른다. 침묵 속에서 맹렬하게 조여 오는 동은과 교감하고자 기꺼이 바둑의 세계에 빠져드는 그들 말이다.
오는 3월10일, ‘더 글로리 파트 2’가 시작된다는데…. 올해 봄이 유독 더 기다려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까.
류정민 이슈1팀장 jmryu@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