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총선, 한나라당 소장파 성명
이상득 국회부의장 2선 후퇴 요구
나경원 비판했던 국민의힘 초선과 차이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향후 일체의 국정 관여 행위를 금해야 한다.”
2008년 3월 23일 한나라당 공천자 55인이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에 직격탄을 날렸다. 공성진, 차명진 등 한나라당 소장파 정치인들이 주도한 이날 성명은 총선 판도에 격랑을 일으켰다.
제18대 총선을 불과 보름여 앞둔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현직 대통령(이명박)의 친형을 향해 2선 후퇴를 종용한 여당 소장파의 단체행동은 친이계(친이명박계) 의원들도 참여했다.
2008년 4월 제18대 총선은 한나라당 압승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선거였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2개월 만에 치르는 선거. 한나라당은 과반 의석 달성은 물론이고, 전체 의석 3분의 2를 넘보는 압승을 기대할 정도였다.
문제는 한나라당 공천을 둘러싼 내분이었다. 이상득 부의장의 선거개입을 우려하는 ‘형님 공천’ 논란은 한나라당을 사분오열로 인도했다. 공멸의 위기 앞에서 한나라당 공천자 55인이 힘을 모았다. 소장파를 중심으로 청와대와 여당 지도부를 향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한나라당 55인 성명을 친이계 내부의 파워게임으로 해석하는 시선도 있었다. 이상득 부의장과 이재오 의원의 정치적인 힘겨루기가 사태의 본질이라는 해석이다.
성명에 참여한 의원 중에 이재오계로 분류되는 정치인들이 있었지만, ‘이상득 vs 이재오’ 대결 구도는 본질을 빗겨 난 해석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형님 공천 논란에 제동을 걸지 않을 경우 제18대 총선에 애를 먹는 것은 물론이고,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에 큰 어려움으로 이어질 것이란 충정에서 행동에 나선 것이란 반론이다.
“이대로 가면 과반 의석 목표가 물거품이 되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 우려된다.”
한나라당 소장파 55인 성명은 청와대를 향한 고언(苦言)을 담고 있었다. 총선을 앞두고 여당 내부에서 청와대를 비판하고, 대통령 형님의 용퇴를 권유하는 것은 정치적인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다.
15년 전 한나라당 소장파 성명이 정치사에 각인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당시 성명을 둘러싼 여러 정치적 해석이 나왔지만, 정당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다수였다. 여당 내부의 자정 기능을 보여주는, 역동성을 상징하는 징표로 인식됐다는 얘기다.
최근 나경원 전 의원을 향한 국민의힘 초선 의원들의 성명을 놓고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대표적인 보수 패널 중 한 명인 전원책 변호사는 지난 25일 KBS의 ‘여의도 사사건건’에 출연해 “(초선 의원들이 성명에서) 나경원을 축출해야 될 어떤 정치인으로 묘사를 했지 않습니까? 나는 그거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전 변호사는 “우리 당내 민주주의를 위해서 열심히 뛰어야 할 초선 의원들이 할 일입니까”라고 반문했다.
초선 의원들이 개혁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기보다는 권력에 편승하려는 태도를 보인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여기에는 정치를 길게 보라는 당부의 메시지가 녹아 있다.
2008년 3월 23일 한나라당 55인 성명 이후 상황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대통령 형님은 불출마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상득 부의장은 한나라당 후보로 포항시 남구·울릉군에 출마해 69.6% 득표율로 당선됐다.
정치인 이상득에게 다시 정치의 길이 열린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이와 달랐다. 이상득 부의장은 2008년 총선을 끝으로 공직 선거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나라당 공천 파동은 결국 선거의 먹구름으로 이어졌다. 한나라당은 18대 총선에서 153석을 얻으며 과반 의석을 달성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내부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과반 의석을 턱걸이했다는 자성론이 번졌다.
당연히 압승할 것으로 예상했던 제18대 총선이었는데,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얘기다. 특히 부산과 대구 등 영남권에서 의석을 잃었다는 게 뼈아팠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총선 다음 날 중앙선대위 해단식에서 선거 결과와 관련해 이런 반응을 보였다.
“겸허하게 수용하고 낮은 자세로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공천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드린 점이 민심에 반영돼 표로 돌아왔다.” “겸손하고 또 겸손해져야 한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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