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류태민 기자] “전세보증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죠.”
지난 5일 인천 미추홀구 숭의동 일대 한 아파트에서 만난 안상미씨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울분을 토로했다. 2020년 이곳으로 전세 이사 온 안씨는 지난해 6월 자신이 살던 아파트 단지가 통째로 ‘깡통전세’가 됐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경악했다. 그는 “갑자기 아파트 우편함마다 똑같은 우편물이 꽂혀 있어 주민 소통방에서 이야기를 나눠봤다”라며 “단지 내 50여 가구 넘는 세입자가 동시에 경매 통지서를 받았다고 해서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미추홀구 일대는 1~2개 동으로 이뤄진 ‘나홀로 아파트’나 ‘도시형 생활주택’이 밀집된 지역이다. 이른바 '건축왕'으로 불리는 건축업자 A씨는 10여년간 일대 2700채의 건물을 대부분 직접 신축했다. 지인 등으로부터 명의를 빌려 나홀로 아파트나 빌라를 새로 짓고 나서 전세보증금과 주택담보 대출금을 모은 돈으로 또 다시 공동주택을 신축하는 방식으로 부동산을 늘린 것이다.
임차인들 증언을 종합하면 A씨는 이들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비수도권에 위치한 한 개발사업에 수천억원에 달하는 금액을 투자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에 주택 임차인들의 전세보증금도 사업비로 투자했지만 사업이 부진하면서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A씨가 더 이상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그가 소유한 주택들이 차례로 경매에 넘어갔고, 안씨가 살고 있는 주택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다급해진 안씨는 자신을 대신해 집주인과 연락해주던 부동산 중개인에게 연락을 취해봤지만 아는 게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답답해진 그는 결국 집주인에게 문자를 남겨놨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일이 터진지 한 달가량 지난 후에나 “죄송하다. 좀만 기다려달라”라는 소득없는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이대로 손 놓고만 있을 수 없다고 본 안씨는 아파트 주민들과 ‘미추홀구 전세사기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대책마련에 나섰다. 현재 미추홀구 숭의동, 도화동, 주안동 등 지하철 1호선 도원역~도화역 일대 66개동의 피해 단지가 대책위원회에 참여한 상태다. 대책위원회는 깡통전세 사기 피해 주택이 총 2805가구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 중 1890가구가 경매에 넘어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피해 예상되는 전세보증금은 무려 약 907억원이다.
대책위는 꾸준히 단체 행동에 나서고 있다. 안씨가 사는 아파트 단지 발코니 곳곳에는 전세사기 구제방안을 촉구하는 붉은색 현수막이 걸려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단지 내부에도 ‘전세사기 수사중’, ‘계약주의’ 등 전세사기 피해아파트임을 나타내는 포스터가 사방에 붙어있었다. ‘전세반환없이 절대 퇴거불가’라며 투쟁의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이러한 단체행동의 흔적은 숭의동 일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안씨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5차선 도로를 사이에 둔 길 건너편 단지에도 발코니 곳곳에서 붉은 현수막을 내걸어 놨다. 인근에는 아예 전 층이 단합해 ‘전세사기보증금반환’이라는 팻말을 내걸어 놓은 단지도 있었다.
이번 전세사기에 대한 소식이 퍼지면서 주민들의 불안감도 커지는 분위기다. 2년 반 전에 숭의동 일대 빌라로 이사왔다는 주민 이승희(33세)씨는 “우리 동네에서 대규모 전세사기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덜컥했다”라며 “혹시 내가 살고 있는 집도 깡통전세 등의 문제는 없는지 수차례 확인했다”라고 심경을 털어놨다. 숭의동 한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이모씨는 “전세사기와 관련된 뉴스가 나오자 식사하러 오신 손님 중에는 전세사기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시는 분들이 꽤 있다”라고 전했다.
일대를 찾는 임차 수요자들 사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숭의동 A공인중개사사무소(공인) 관계자는 “최근 들어 이 지역에서 전세 물건을 찾는 이들이 확연히 줄었다”라며 “그마저도 전세사기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세입자들이 계약을 망설이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일대 B공인 대표도 “일부 중개업소도 전세사기에 연루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애꿎은 일반 중개사들도 피해를 보고 있다”라고 토로했다.
류태민 기자 righ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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