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서믿음 기자] 8일 세상을 떠난 김지하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상징하는 ‘영원한 저항 시인’이다. 이념의 편향과 편견에 맞서 세상을 향해 울림을 전했다. 시대를 관통하는 그의 목소리는 시에 담겨 우리의 곁에 다가왔다. 때로는 논란의 중심에 서서 여론의 심판대에 오르기도 했다. 정치와 사회 현안에 대한 그의 일갈도 이제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는 투병 생활을 이겨내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향년 81세.
유족으로는 장남 원보(작가)씨와 차남 세희(토지문화재단 이사장 겸 토지문학관 관장)씨가 있다. 2019년 별세한 김지하의 부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은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고(故) 박경리의 외동딸이다.
김지하의 본명은 김영일이다. 그는 1941년 2월4일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다. 서울 중동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미학과를 나왔다. 우리가 그를 시인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작품을 통해 세상에 전한 메시지 때문이다.
그는 1963년 ‘목포문학’에 필명 김지하라는 이름으로 ‘저녁 이야기’라는 시를 발표했다. 지하는 지하에서 활동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1969년에는 ‘황톳길’ 등의 시를 ‘시인’ 지에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70년 5월호 ‘사상계’에 발표한 ‘오적’이라는 시는 김지하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한 계기였다. 오적은 부패한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김지하는 이를 계기로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1974년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김지하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는 1975년에 발표됐다. 이를 계기로 노벨평화상과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오적과 타는 목마름으로는 저항시인 김지하의 분신과도 같다. 독재권력을 향한 그의 거침없는 언행은 고초의 원인이 됐다. 인혁당 사건이 조작됐다고 고발하는 글을 언론에 발표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김지하는 1991년 그 사건 때문에 과거의 동지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됐다.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치사사건과 관련해 대학생들이 분신으로 항의의 뜻을 이어가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칼럼을 언론에 기고한 게 논란의 원인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작가회의)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2012년 대선에서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진보와 보수 양쪽으로부터 찬사와 비판을 받았던 인물. 김지하의 삶에 대한 평가와 무관하게 그가 남긴 시는 그 자체로 역사다. 김지하는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정지용 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김지하가 남긴 시집으로는 ‘남(南)’(1984) ‘살림’(1987) ‘애린 1’(1987) ‘검은 산 하얀 방’(1987) ‘이 가문 날에 비구름’(1988) ‘나의 어머니’(1988) ‘별밭을 우러르며’(1989) ‘중심의 괴로움’(1994) ‘화개’(2002) ‘유목과 은둔’(2004) ‘비단길’(2006) ‘새벽강’(2006) ‘못난 시들’(2009) ‘시김새’ (2012) ‘흰 그늘’(2018) 등이 있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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