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흔히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인간은 선한 신의 의지를 지상에 행할 중간자로서 굉장히 중요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나오지만, 중동의 모든 신화에서 이렇게 인간창조가 아름답게 그려지진 않습니다.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 즉 메소포타미아 일대에 전해지는 수메르-바빌로니아 신화에서 인간창조는 매우 세속적인 이유로 그려져있는데요.
수메르 신화에 의하면, 지상을 창조할 당시 수메르의 신들은 큰 신들과 작은 신들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큰 신들은 땅을 개척하는 일을 관리, 감독하고 작은 신들은 중노동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잦은 야근에 분노한 작은 신들이 일대 파업을 일으키는데, 꼭두새벽부터 연장을 부수고 신들의 통치자인 '엔릴'의 집에 몰려갔다고 나와있죠. 이에 놀란 큰 신들은 대책회의를 열어 작은 신들의 노동을 덜어주고자 일종의 생체로봇을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그게 바로 '인간'이었죠.
수메르 신화 속 지혜의 신으로 불리는 '엔키'는 산파의 여신 '아루루'와 힘을 합쳐 인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강가의 검은 흙과 신의 피를 섞어 아루루의 자궁에 안착시켜 사람을 만들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그래서 '검붉은 흙'이란 뜻의 '아다마(Adama)'라 불리는 인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아다마란 이름이 중동 여러지역에 전파돼서 '아담'이란 이름의 어원이 됐다는 설이 있죠. 이 아다마들은 황무지인 '에디누'에 배치돼 열심히 개간사업을 벌였다고 합니다. 이 에디누는 나중에 에덴동산의 어원이 됐다고 합니다.
로봇이 체코슬로바키아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가 쓴 희곡에서 노동을 의미하는 '로보타(Robota)'란 단어에 온 것을 생각하면, 아담과 로보타가 거의 뜻이 같은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노동과 파업문제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사회문제로 대두됐는지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죠. 한편으로 주 52시간과 최저임금이 한창 이슈인 21세기나 거의 1만년전 문명의 태동시기나 서민의 삶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줍니다. 신들도 흙수저인 작은 신들은 고달픈 삶을 살았다는 거니까요.
과거보다 현대에 더 많은 모티브를 주고 있는 이 신화는, 외계인 창조설부터 고대 노예제 경제까지 다양한 함의를 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제 수메르와 바빌로니아의 점토판들을 봐도 당시 얼마나 많은 경제활동들이 벌어졌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일부 점토판에는 노동력을 담보로 목돈을 먼저 받고, 나중에 계약기간이 끝날 때 받은 돈을 돌려주는 일종의 전세계약서까지 있습니다. 이런 계산적인 사람들이 믿던 신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인간 창조의 이유까지 파업이란 점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한편으로 뭔가 수메르 신화의 인간창조 이야기는 현대인들의 입장에서, 전혀 신화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죠. 현대인들도 과도한 노동에서 해방되기 위해 인공지능(AI) 로봇을 개발하고 있는 만큼, 수메르의 신들이 신이라기보다는 뛰어난 과학문명을 가졌던 인간 정도로 느껴집니다. 그러다보니 이 신화는 갖가지 SF 영화의 토대가 되기도 했죠. 에일리언의 프리퀄 영화로 알려진 프로메테우스 시리즈 역시 이 신화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네요.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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