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과 노력, 청춘 녹인 ‘부동산 용광로’…30년간 임금 6.7배 오를 때 강북 아파트 7배, 강남 16배 올라
[아시아경제 류정민기자] "또 꿈을 꿨나…." 잠에서 깬 진욱(50)은 혼잣말을 한 뒤 창밖을 바라봤다. 새벽 3시, 가로등 불빛 넘어 드문드문 차량이 오갔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몸을 뉘었다.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내다가 다시 '그 생각'에 빠져든다.
◆추석마다 열리는 동창회…화제로 등장한 부동산=진욱은 며칠 전 고등학교 동기들을 만나고 왔다. 명문고 소리를 듣던 진욱의 모교는 지역에서 위상이 대단했다. 해마다 서울대 합격생 ○○명을 배출하던 학교였다. 진욱도 남부럽지 않은 명문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모범생’ 그 자체였다. “국영수는 교과서 위주로 공부를….” 언젠가 TV에서 전문가라는 사람이 한 얘기를 철석같이 믿으며 공부했다. 그날 만난 이들도 진욱과 비슷한 모범생들이었다. 대부분 대학을 나와 나름대로 사회에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10대 시절을 회상하며 밝게 웃었지만, 늘어난 얼굴 주름과 숱이 줄어든 머리 등 외모는 세월의 고단함을 숨길 수 없었다.
진욱과 친구들은 추석과 설날 등 명절 때마다 동창회를 연다. 고향을 떠나 전국 곳곳에 흩어져 사는 이들이 모처럼 만날 좋은 기회였다. 며칠 전 모임도 여느 때의 명절 동창회와 다를 바 없었다.
실제로 학창시절 얘기, 군대 얘기, 정치 얘기, 자식 얘기와 함께 부동산 문제가 화제로 등장했다. 어떤 친구가 건물주가 됐다느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 값이 크게 올랐다느니 하는 내용이었다. 옛날 서울 압구정동 땅에서 배추밭을 일궜던 누군가가 빌딩을 올렸다는 얘기만큼이나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 얘기였다.
◆1988년 아파트 값, 강북이 강남보다 비쌌다=하지만 민규(50)의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난 뒤 생각이 달라졌다. 경제 관련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민규는 최근 30년간 서울의 아파트값 변화를 연구했다고 한다.
"요즘은 다들 강남, 강남 그러는데 1988년에는 강북의 아파트가 강남보다 비쌌더라고." 민규가 분석한 강남과 강북의 대표 아파트를 비교해보니 강남은 3.3㎡당 285만원, 강북은 315만원이었다.
민규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진욱에게 넌지시 물었다. "근데 너 강북 아파트에 산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거기에 있는 거야?"
"그렇지, 1995년에 입주한 다음 한 번도 이사를 안 갔어." 갑자기 사는 곳을 묻자 진욱은 일상적인 안부 인사로 받아들였다. 사실 진욱은 사는 곳에 만족하며 살아왔다. 아늑하면서도 운치 있는 공간이었다.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로운 지하철역이 생기면서 교통은 더 편리해졌다. 아파트 뒤쪽의 산책로를 통해 뒷산에 오르는 것은 삶의 소소한 기쁨이었다. 20년이 지난 아파트라서 조금 낡았지만 수리가 잘 돼 있어 사용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올해 초를 기준으로 조사해보니 우리가 샘플로 삼은 강남 아파트 평균이 3.3㎡당 4536만원이더라고. 근데 강북은 2163만원이었어."
민규의 추가 설명에 진욱은 물론 주변 친구들도 귀를 기울였다.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부동산 소식은 뉴스로만 접했을 뿐 3.3㎡당 가격이 어떻게 변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30년간 아파트값이 강남은 16배, 강북은 7배 올랐더라고. 1988년 근로자 평균 임금이 월 36만원이었다가 2016년 241만원으로 6.7배 올랐어. 그것에 비하면 강남 아파트값 상승률은 훨씬 높은 편이지."
민규의 설명에 다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비슷한 삶의 궤적을 보인 두 사람, 신혼 때 아파트 선택이…=사실 진욱도 부동산 이슈와 완전히 담쌓고 지낸 것은 아니었다. 주변 사람이 너도나도 아파트 투자에 열을 올릴 때 마음이 움직였던 것도 사실이다. 단지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 뿐 거의 투자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진욱은 그때마다 삶의 자세를 되새기며 자신을 위로했다. 1980년대 후반 대학을 다녔던 진욱은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 대부분이 그렇듯 심정적인 동조자였다.
부동산 투자로 '한 방'을 꿈꾸는 삶은 젊은 시절 자신의 신념과 배치되는 모습이었다. '부동산값 폭락'을 전망하는 주변의 우려를 의식한 측면도 있었다.
진욱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민규 옆 테이블에 있던 주영(50)이 진욱과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요즘 우리 아파트는 조합원 총회다 뭐다 해서 시끄럽더라고. 건설사들이 제안한 내용을 보니 놀랍기는 하더라."
1990년대 중반, 주영이 회사(광화문)에서 먼 강남의 아파트를 산다고 할 때 이해하기 어려웠다. 학창 시절부터 시간의 소중함을 중시했던 진욱은 출퇴근으로 낭비하는 시간이 가장 아까웠다.
주영은 아내의 설득에 넘어가 강남에 아파트를 마련했는데 그게 '신의 한수'가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주영은 당시 3.3㎡당 800만원 정도를 주고 아파트를 샀는데 현재 부동산 시세는 4000만원대 중반까지 치솟았다.
◆8·2 부동산 대책, 다시 정부를 믿어도 될까=진욱은 최근 며칠간 새벽마다 잠을 깨는 이유를 깨달았다. 원칙을 지켜가며 열심히 살았던 자신의 삶에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인생에 만약은 없다지만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잠을 설친 진욱은 TV를 켜며 하루를 시작했다. "정부는 8·2 부동산 대책 후속 조치를 통해 집을 투기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면서…."
역대 가장 강력한 대책이라는 8·2 대책에도 집값 불안을 쉽게 잠재울 수 없는 모양이다. '지금이라도 강남 아파트에 투자해야 하는 게 아닐까. 재건축시장이 달아오른다는데.'
부동산의 '부'자도 몰랐던 진욱과 같은 사람까지 강남 재건축 투자에 관심을 두는 현실, 부동산 열기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뒤늦게 뛰어들었다가 상투만 잡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번 정부를 믿어야 할까. 또 믿는 사람만 바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진욱은 풀리지 않은 의문을 간직한 채 피곤이 가시지 않은 몸을 이끌고 출근길에 나섰다.
오늘따라 전철은 더 만원이었다. 푸석해진 얼굴, 피로에 지친 표정의 ‘닮은꼴 인생들’이 그 공간에 함께 있었다.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진욱의 소리 없는 물음에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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