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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밥그릇과 심(心)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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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밥그릇과 심(心)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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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에 확실한 '비법'이 있다. 탄수화물 섭취를 '덜 고통스럽게' 줄이는 방법이다. 지금까지 익히 알려진 민간요법은 이렇다. 밥그릇에 밥을 담을 때 처음에는 1/3 정도 줄이고 시간이 지나서는 1/2만 담는다. 하지만 이 방법은 '밥그릇 크기'와 '밥의 양'의 괴리가 문제다. 그릇에 비해 적은 양의 밥이 담긴 시각적인 모습은 '덜 먹어야 한다'는 고통스러운 주문을 우리 뇌에 전달한다. 대개는 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1/3에서 1/4, 1/5로 회귀하다가 결국 원래 양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밥그릇을 바꿔야 한다. 지금보다 작은 밥그릇에 밥을 적당히 담으면 우리 뇌는 '충분한 양'을 먹는 것처럼 인식하고 이내 포만감을 느낀다. 일종의 눈속임이다. 이런 뻔한 거짓말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것이 인간의 취약함이다. 눈앞의 욕망에 쉽게 흔들리는 원시적인 허약함이랄까.

실은 밥상의 밥그릇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 마음은 그것이 '욕심'이든 '욕망'이든 '인격'이든 '인품'이든 무엇인가를 담는 그릇이어서 마땅히 갈고닦아야 한다. 육신을 위한 그릇을 챙기듯 영혼을 담는 마음의 그릇도 수행을 동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 그릇만 채우려고 남의 것을 빼앗거나, 이미 충분히 넘치는데도 더 갖겠다며 추태를 부리는 무리들이 주변에 숱하다. 겨우 한 냥어치의 그릇이 만 냥어치의 권력을 쥐락펴락하다보니 주변이 불행해지기도 하고, 종지그릇인 주제에 대양(大洋)을 담겠다고 허세를 부리는 바람에 이웃들이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릇이 안되는 인간들이 '줄'과 '빽'과 '배경'에 기대 권위를 탐하고 오만방자해지는 꼴에 국민들이 거품을 무는 것이다.

자기 그릇에 대한 성찰은 나와 이웃과 조직에 대한 예의다. 우리는 저 그릇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저 그릇을 어떻게 키워갈 것인가. 사랑이나 증오? 이타심이나 이기심? 크고 깊고 담대한 그릇에는 이웃들이 오가게 마련이요, 바닥난 종지그릇에는 똥파리도 꼬이지 않는 법이다.


류시화의 신작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는 아메리카 인디언 체로키 부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우화가 있다. 부족의 원로 전사가 손자에게 삶에 대해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다. 그것은 분노이고, 질투이고, 탐욕이다. 거만함이고, 거짓이고, 우월감이다. 다른 한 마리는 선한 늑대다. 그것은 친절이고, 겸허함이고, 공감이다. 기쁨이고, 평화이고, 사랑이다." 손자가 묻는다. "어느 쪽 늑대가 이기죠?" 노인이 답한다. "네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기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심판 최후진술을 보면 얄팍하고 옹졸한 마음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14페이지 분량에 1822개 단어로 이뤄진 진술서는 '국민'(20번), '국가'(14번), '약속'(13번) 따위의 기만적인 단어들을 남발하면서 '반성 없는 아집'과 '뉘우침 없는 몽니'로 일관한다.


과연 인간 박근혜의 그릇이 조금이라도 '대통령감'에 가까웠다면 대한민국이 이 지경까지 왔을까. 도대체 박 대통령의 마음에는 어떤 늑대가 앉아 있는 것일까. 다음 대선에서는 '리더의 그릇'을 제대로 지닌 인물을 뽑을 수 있을까. 답은 다시 우리로 향한다. 결국은 내가, 우리가, 우리의 그릇이 깊고 넓어져야 한다. '대통령의 수준이 국민의 수준'이라는 말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이정일 산업부장 jay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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