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시골 동네에는 소위 '약장수'들이 오곤 했다. 오일장이 열리면 북 치고 장구치고, 때로는 울긋불긋한 피에로 복장을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곤 했다. 사람들이 신기한 얼굴로 모이면 약장수들이 내놓는 약이 있었다. 호랑이 크림이나 호랑이 연고, 때로 용의 뼈가 들어 있다는 용골 약재 등이다. 호랑이 뼈가 왜 신경통에 좋은 지, 용의 뼈가 진짜인지 궁금하기도 해 물어 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똑 같았다. '애들은 집에 가'
이 약장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이 약만 사용하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것이다. 신경통, 요통, 두통 등등이 다 낫는 만병통치약이라고 했다. 지금도 약장수들은 시골을 돌아다니며 약을 판다고 한다. 세월은 흘러도 속이는 사람이나 속는 사람은 여전한 모양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4차산업혁명도 비슷한 양상이다. 대선주자들조차 앞다투어 4차산업혁명을 주창한다. 어떤 사람은 4차산업혁명이 마치 한국의 구세주인 양, 모든 기업이 달려들어야 하는 '만병통치약'인양 말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4차산업혁명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강한 자가 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존의 파괴적 혁신과 전혀 다른 특성이다. 파괴적 혁신의 특성은 기존의 챔피언이 몰락한다는 것이었다. 50년이 넘는 혁신 연구사에서 이 점은 예외가 없었다.
범선은 증기선과의 경쟁에서 패했으며, 워크맨의 소니는 MP3라는 새로운 혁신적 플레이어의 등장으로 패배했다. 게임산업의 혁신에서도 동일한 과정이 반복된다. 한국에서 PC라는 새로운 게임 플랫폼이 등장할 당시, 콘솔의 제국이었던 소니나 닌텐도는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다 뼈아픈 실패를 맛보았다. 그리고 이제 '혁신의 재앙'은 한국 게임사에 돌아오고 있다. 가상현실(VR)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의 등장에 한국 게임사는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점에서 4차산업혁명은 파괴적 혁신이 아니라고 보아야 할 지 모른다. 아니 연속적 혁신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연속적 혁신은 약자가 판을 뒤집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한국이 가지는 위기감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4차산업혁명의 주요 모듈인 인공지능(AI)은 구글의 딥마인드나 아마존의 알렉사가 대표 주자다. 자율주행이나 로봇의 경우 도요타, 혼다, 테슬러 등이 있고, 사물인터넷은 GE, 빅데이터에는 아마존, IBM 등이 포진하고 있다. 이런 글로벌 리그에 낄 수 있는 한국 기업은 삼성전자나 현대차 정도다. 하지만 이런 기업조차 4차산업혁명의 글로벌 리그에 낄 수 있다는 말이지 그 흐름을 주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4차산업혁명은 융합이기도 하다. 이미 제조업과 ICT(정보통신), 은행과 ICT 등 전통적인 산업 장르의 구분은 의미를 상실했다. 게임회사인 닌텐도는 애플이 자사의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다. 도요타도 검색회사로 여긴 구글이 자신의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것은 현실이 되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뒤죽박죽이고, 하루 밤 자고 일어나면 기업 간 제휴 관계도 엉클어져 있다. 상황이 이러니 기업도 정부도 개인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4차산업혁명의 본질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덤비라는 것은 나가서 전사하라는 말과 같다.
4차산업혁명에 직면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우리의 역량에 대한 분석과 전략적 목표의 설정이다. 세계를 제패했던 한국 게임의 핵심역량은 엔진도 미들웨어도 아니었다. 바로 게임과 서버 기술의 결합에 기반한 콘텐츠 제작 역량이었다. 게임 제작에서 콘솔보다 떨어지는 역량은 이용자 커뮤니티라는 새로운 시스템의 도입으로 커버했다. 이런 역량의 구축과 진화에 의해 한국 게임은 세계를 뒤흔들었던 것이다.
한국은 어떤 기술을 가지고, 어떤 핵심역량을 기반으로 4차산업혁명에 대응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후세에게 약장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고민할 문제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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